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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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3월 3일 제주도에서 의병장 고승천과 이중심의 주도하에 전개하려던 항일 의병 운동. 의병이란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조정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백성 스스로가 일어나 조직하는 일종의 민군(民軍)을 말한다. 의병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임진왜란과 한말이라 할 수 있다. 한말의 의병은 1894년의 청일 전쟁과 갑오개혁을 통하여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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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오인 발포하여 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 1945년 해방 후 제주도에서는 주민 자치 조직인 제주도 인민 위원회가 구성되어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진주하면서 한국에 대한 모든 통치권은 미군에 의해 귀속되었다. 미군정은 38선을 기점으로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고자 남한 내 모든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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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제주 4·3사건의 원혼을 위무하기 위하여 개최하는 종합 예술제. 4·3문화예술제는 제주 4·3사건의 진상 규명과 도민의 명예 회복을 도모하며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 4·3사건을 예술로 끌어올려 진상 규명 작업을 환기시키고 제주 4·3사건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개최되었다. 1989년 도내외 11개 사회 단체로 구성된 41주기 4·3추모제공동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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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열은 14살에 약혼해서 1948년 음력 12월 27일 16살에 결혼을 했다. 시집도 금릉에 동네에서 결혼했다. 남편 이름은 이두행이고 두 살 위였다.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시어머니 살아계실 때 시어머니가 동네에서 오고 가며 보고는 고시열을 착하고 예쁘다고 며느리 삼겠다고 했다. 어른들끼리 와서 술 한 잔 하면서 사돈하자고, 결혼 시키자고 얘기 한 것이 약혼이었다.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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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의 풍속(風俗)·풍광(風光)·사적(史蹟) 등을 둘러보는 유람 활동. 제주시는 탐라의 역사 발상지일 뿐 아니라 제주도의 역대수부로서 행정·산업·교육·문화의 중심지여서 독특한 인문적 관광자원을 간직하고 있다. 제주시 지역은 제주도의 관문이기 때문에 관광객들은 제주시를 통해 방문하게 된다. 제주 방문 관광객의 경우 1971년도에는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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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 2동 887-1번지에서 일도 1동 1476-2번지에 이르는 도로. 관덕로는 서문 로터리를 기점으로 관덕정과 중앙 로터리를 지나 동문 재래시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687m의 일직선 도로이다. 관덕로는 보물 제322호인 관덕정 앞을 지나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명칭이 부여되었다. 관덕로에서 동쪽으로 중앙 로터리를 거쳐 동문교까지 이어지는 관덕로는 칠성로와 함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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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관덕정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제주목 관아에 세워졌던 관덕정은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고 부를 만큼 매우 웅장한 규모의 정자로, 1448년(세종 30) 당시 목사였던 신숙청(辛淑晴)이 군사훈련청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관덕정」은 관덕정을 세우는 과정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로, 육지에서 전해 내려오는 「에밀레종 전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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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신숙청(辛淑晴) 제주목사가 창건한 관덕정 앞 광장. 관덕정 광장은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1448년(세종 30) 신숙청 제주목사가 창건한 관덕정 앞 광장이다. 관덕정은 제주도를 상징하는 건물로서 제주목 관아가 자리한 이 일대는 제주 정치의 중심지였다. 1901년(광무 5)에 외국인 신부의 위세를 믿고 범법(犯法)을 자행하던 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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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1만 8천 신이 지상으로 내려와 ‘새철 드는 날’(입춘날)에 제주목 관아에서 제주목사를 비롯한 관리들과 무당들이 같이 행하던 굿놀이판이 있었다. 이를 현대에 재현하여 탐라국입춘굿놀이라는 민속놀이 축제를 만들었다. 제주시가 주최하는 관민 합동의 도시 축제로 전승·발전·확대시켜나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 축제이다. 탐라국입춘굿놀이는 다양한 볼거리와 함께 제주 사람들의 넉넉하고 훈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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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 1동과 이도 2동 사이에 있는 도로. 일반적으로 시청이 들어서 있는 지역은 상업이 발달돼 있다. 제주시의 경우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현재 제주시청[옛 제주도청 자리]이 들어선 광양 로터리 부근의 상권은 발전해왔고, 지금도 다른 지역과는 달리 발전하고 있다. 광양(光陽)은 광양(廣壤), 과양이라고 불렸다. 옛부터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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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사람이나 물건 또는 의사, 정보가 떨어져 있는 어떤 지점 사이를 이동하는 일. 제주시 교통 변화의 50년은 제주도 교통 변화의 50년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시의 교통을 개관하면서 거시적으로는 제주도의 교통과 맥을 함께 서술하였다. 해방 이후 우리는 급속한 발전과 변화를 겪어왔다. 제주시의 발전도 마찬가지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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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심의 부친 김태준은 법원 서기로 출발해서 전주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한 후 제주도로 내려와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변호사로 일생을 보냈다. 일제강점기에는 법원 사무원이었고 광복 후에 사법제도가 바뀌면서 법관이 부족하니까 임시 법관 후보 시험이 있었다. 그 시험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었다. 서울법원에 시보로 있다가 4·3사건 때는 서울에서 근무했고 그 후 제주도로 내려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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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심은 1941년에 제주북소학교에 입학해서 5학년 때 광복되었다. 제주북소학교는 남녀반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남자는 2학급, 여자는 1학급이었는데 광복 후에 일본에서 고향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학생수가 많아졌다. 1, 2반은 정상적인 취학생들이고, 3반은 나이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한 학급은 남녀혼성반이었다고 한다. 김금심은 김홍식처럼 제주북국민학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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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 관아를 ‘영’이라 불렀고,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 사이에 있는 골목 일대를 ‘영뒷골’(영의 뒤쪽에 있는 골목이라는 뜻임)이라 한다. 처음에는 ‘영뒷골’에 살다가 태평양전쟁이 한참일 때 집을 지어서 이사했다. 김금심은 4·3 때 여중생이었고 북교 후문 전신전화국 사택 근처에 살았다. 그 당시 이 근처는 주택가가 아니었다. 묵은성에도 농사짓는 밭들이 있었다. 주로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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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에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집에 보관되어 있는 오래된 물건들(해녀 잠수옷, 해녀 물질할 때 필요한 도구 등의 자료)이 있으면 가지고 오라고 해서 역사관이 시작되었다. 초창기에는 이러한 물건을 학교 측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역사관이 만들어지고 나서 제대로 전시해 놓았다고 한다. 현 교장 선생님이신 김경식 선생님의 노력으로 이 역사관은 빛을 발하게 되었다. 역사관을 방문한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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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은 해안가에 있는 마을이다. 제주시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30㎞를 달려가면 김녕마을을 만나게 된다. 기온은 연평균 약 11.8C, 평균 강수량은 1,444㎜로 제주특별자치도의 평균 기온 및 강수량에 조금 못 미치고 있다. 이는 차가운 바닷바람과 강한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 제주도에서 보기 드물게 하천이 없어 마을에 다리가 없는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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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때 제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선비. 당시 의병장이었던 고사훈(高仕訓)[1871~1909]은 1908년 7월에 제주도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당시 제주군수였던 윤원구(尹元求)로부터 전해 듣고 의병 활동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김석윤(金錫允)[1877~1949], 노상옥(盧尙玉)과 함께 제주읍 이도리 광양에 대장간을 차려 무기를 제조하는 한편 황사평에서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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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1745년(영조 21) 이산부사 재임 중 사간원정언 이응협(李應協)[1709~?]이 “이산부사(理山府使) 김몽규는 탐욕스러운데다가 불법을 자행하여, 원망이 무더기로 일어나고 있으며”라는 상소를 올려 파직되었다. 1752년(영조 28) 12월 윤구연(尹九淵)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으며, 1754년 (영조 30) 10월에 영조의 탄신일에 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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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김몽규를 기리는 비. 김몽규 제주목사 겸 방어사는 1752년(영조 28) 12월에 제주도에 부임하고 1754년(영조 30) 10월에 파면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삼읍성문(三邑城門) 바깥에 옹중석(翁仲石) 일명 우형석(偶形石)을 새로 세웠으며, 운주당(運籌堂), 관덕정(觀德亭), 읍진창(邑賑倉), 동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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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이 27살 때(1967년) 누이동생이 인근 편물점에 편물 기술자로 있는 현재의 부인(당시 22살)을 소개시켜 주어 혼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인은 당시 용담동 인근의 편물점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김성원이 혼인할 당시 남자 나이 스물일곱은 혼례 치르기에 다소 늦은 나이였다. 친구들은 거의 장가를 간 때였다고 한다. 스물다섯만 되면 부모들이 장가를 보내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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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은 오현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일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제주 시내에는 신통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육지로 일자리를 찾아 출도했다고 한다. 작은 형도 서울로 이사를 했는데, 1960년대에는 제주에서 취업하기 어려운 경우, 육지로 취업하기 위해 출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제주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학교를 중퇴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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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744년(영조 20)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778년(정조 2) 남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2월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인 1780년(정조 4) 각 목장에서의 소와 말이 분실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각 산장(山場)의 경계에 담장을 쌓아 군마(軍馬)와 민마(民馬)를 기르는 데 편리를 도모하게 하였다. 또한 홍수로 하천이 범람하여 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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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金洪植)[1929. 5. 11.(양)~, 78세]은 1929년에 제주시 아라동에서 태어났지만 북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이도동으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1957년에 결혼하면서 지금까지 묵은성에서 살고 있다. 슬하에 3남매(2남1녀)가 있으며 1957년부터 1995년까지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2005년에 『삼도2동마을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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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관덕정 앞 교통대에서 남문 로터리 사이에 있는 도로. 남문로에 위치하고 있는 오래된 건물은 천주교 제주 중앙 교회와 지방공사 제주 대학교 병원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현재 제주 대학교 병원 앞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는 곳엔 관청못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때문에 제주 대학교 병원 앞길을 옛날엔 관청골이라고 불렀다.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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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있던 조선 시대 활터. 달관대는 조선 후기에 제주목사 김정[1670~1737]이 돌에 달관대(達觀臺)라 새기고 그 위에 과녁을 설치해서 활을 쏘는 장소로 삼았던 곳이다. 신광수(申光洙)가 지은 『탐라록(耽羅錄)』에 ‘재삼천서당방(在三泉書堂傍)’이라고 쓰여 있듯, 근처에 역시 김정 목사가 설립한 삼천서당이 자리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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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는 이형상 제주목사가 재임할 당시 제주도를 동-남-서-북으로 한 달 간 걸쳐 순력(巡歷)하고 돌아와서 그간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28폭의 그림에 담아낸 총 41면으로 된 도첩(圖帖)으로, 채색화이자 기록화이다. 기록화는 특정한 사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그 내용을 시각적으로 전달한 그림을 말한다. 중앙에서는 도화서 화원(畵員)들이 의궤도를 비롯한 기록화를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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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인간이나 차가 다니는 비교적 넓고 큰 길. 해방 후 제주의 교통은 1961년 5·16군사쿠테타 정부가 수립된 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주의 미개발된 천연 자원과 민속 등을 자원으로 하여 관광 개발을 정부시책으로 추진하면서부터 사회 간접 자본의 건설로서 시작되었다. 그 뒤 정부는 1973년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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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제주 4·3 유적지. 도립병원 옛터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0년 관립 자혜의원으로 개설되어 1927년 전남도립 제주의료원으로 불리다가 1946년 제주도가 도로 승격되어 제주도립병원이 되었다. 2001년부터 제주대학교가 인수하여 운영 중이다. 제주도립병원은 현재 ‘제주의료원’으로 개칭하여 산천단 쪽으로 이전하였으나 아직도 대학 병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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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동헌 앞에 세웠던 표지석. 하마비는 본래 1413년(태종 13) 종묘와 궐문 앞에 세운 것이 우리나라의 시초라고 한다. 그 후 문묘와 지방 관부 등에도 이 하마비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하마비는 통행인의 하마(下馬)를 명령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청의 표석으로도 쓰였다. 비석에는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지 않고, 옛 문헌 등에도 이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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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두2동에 1979년까지 있었던 마을. 1702년(숙종 28)에 만든 「한라장촉」에는 니을포(泥乙浦)라 기록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300년 이전에 마을이 형성 되었던 곳이다. 북서 계절풍을 제외하면 바람이 많은 지역은 아니었으며, 좋은 경작지가 있던 곳으로 보아 농사가 잘 되는 곳이었다. 완만한 해안선을 가지고 있는 바닷가 마을로 반농반어를 생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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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었던 성터. 제주목 관아지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 옛 읍성으로, 탐라국 시대에 고(高), 문(文), 강(康)의 세 성씨의 부호가 살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무근성의 동쪽은 대부호 강만호 집, 서쪽은 고만호 집의 주위 부근을 무근성 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들이 살던 집터는 거의 원형을 잃고 사람들도 흩어져 있어 무근성에 대한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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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1993년 5월 15일에 결성된 민족민주 운동 단체. 민중 생존권 수호, 전 사회적 민주개혁, 민족 자주권 쟁취, 한반도의 자주적 통일을 위해 결성되었다.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은 1989년 1월에 결성되었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 정권의 탄압으로 조직 역량이 약화되자, 침체되었던 재야 운동 세력들이 1991년 12월 1일 전국교직원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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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881년(고종 18) 5월에 백낙연(白樂淵)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883년(고종 20) 5월까지 재임하였다. 1885년(고종 22) 충청도수군절도사를 지내다가 1886년(고종 23)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전보되었다. 『고종실록』과 『제주계록(濟州啓錄)』에 따르면 1881년 윤 7월 제주에서 공마(貢馬) 107필을 사복시(私僕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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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지낸 무신. 본관은 수원(水源)이고, 자는 도원(道源)이다. 아버지는 동금(同禁) 백희수(白希洙)이고, 어머니는 윤민동(尹敏東)의 딸이다. 1877년(고종 14) 1월 이희충(李熙忠)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881년(고종 18) 5월까지 임기를 훨씬 넘겨 4여 년이나 재임하였다. 부임하던 해 가을에 메뚜기 떼로 농사에 큰 피해가 발생하여 주민이 굶주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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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서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 사이에 있는 도로. 번영로는 총 35.4㎞이며, 제주시 구간은 6,72㎞, 구 북제주군 구간은 15.94㎞, 구 남제주군 구간은 11.37㎞로 구성되어 있다. 〈표〉 번영로 현황 1938년 12월 1일 전라남도 고시 216호에 의해 지방도를 지정·고시하였는데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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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법정동이자 행정동. 제주시의 중심 지역의 하나로 삼도 2동은 선사 시대 이래 사람들이 거주한 유서 깊은 탐라의 발상지이며, 삼국 시대부터 탐라국의 행정 중심지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삼도리라 하여 제주면에 편입되었고, 1955년 제주시에 편입되어 삼도 1동과 삼도 2동으로 개편되었다. 1983년부터 과거의 묵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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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행해지는 영리를 목적으로 한 물품 매매업. 상업의 의미는 경제의 발전과 함께 변화해왔다. 넓은 뜻의 상업은 생산에서부터 소비자에게 상품의 사회적 배급, 생산 및 소비의 지도, 가격의 조정, 배급 활동을 효율화하기 위한 촉진적 보조 활동 등을 포함한다. 또한 생산·유통·소비라는 경제순환의 한 과정인 사회경제현상을 일컫는다. 좁은 뜻의 상업은 물품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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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 1동 중앙 로터리에서 삼도 2동 서문 로터리 사이에 있는 도로. 조선시대 제주읍성의 서문이 있었던 곳이라는 데서 서문로라고 이름 붙이게 되었다. 관덕정에서 한천교에 이르는 전장 980m의 이 도로는 폭 10m로 시내 서쪽을 관통하는 주요 간선 도로의 하나이다. 이 도로 부근에는 당시 제주중학교와 제주 중앙 고등학교가 위치해 있어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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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는 허구적인 이야기의 총칭. 제주도의 노인층에게는 설화니, 신화니, 전설이니, 민담이니 하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다만 ‘옛말’이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이 ‘옛말’이라는 말 속에는 신화, 전설, 민담이 전부 내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속담·금기담·예조담(豫兆談) 등의 뜻까지 모두 담겨져 있다. 설화는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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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에 있는 목장. 1956년 9월에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정부가 제주도 국립목장 건설을 계획한 후, 8월에 송당 목장 터에 목장 건설 공사에 착수, 공사비 3,540만환을 투입, 야간 공사 끝에 10월 말에 1차 완공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11월에 1차로 육우를 도입했으며, 동시에 대통령령에 의해 국립 제주 목장으로 공포되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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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새로운 목사(牧使)가 부임하여 왔을 때 불렀던 유희요. 「신목사 타령」이라는 명칭은 제주목사가 부임하여 왔을 때 관기들이 신임 목사에게 인사하러 가면서 부른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관덕정 앞」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설 첫머리에 ‘관덕정 문 앞에’라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심목사 타령」이라고 하는 것은 신목사라는 말이 와전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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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본관은 영산. 아버지는 신제(辛懠),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정씨이다. 1447년(세종 29) 6월 이흥문(李興門)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1448년(세종 30) 7월 관덕정을 창건하여 병사의 훈련 장소로 사용하였다. 대문장가 신석조(辛碩祖)에게 「관덕정기(觀德亭記)」를 짓게 하고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제액(題額)을 받았다.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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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과의 이야기는 용담동 옛 지경들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신옥년의 기억을 빌리자면 해방 후까지 용담동에는 집들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간간히 한천까지 이어지는 길가에 상점들만이 있었다고 한다. 현 서문시장 인근에도 집이 거의 없었고, 서문시장 위로는 거의 소나무밭이었는데, 시신을 묻는 묘지들이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한두기 근처나 부러리 근처 서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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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었던 조선 후기 세워진 교육 기관. 역학당은 관덕정 동쪽 좌위랑에 위치해 있던 서당으로, 18세기 이후 등장했던 개량서당 교육 기관이었다. 이원진의 『탐라지(耽羅誌)』에 의하면, “재관덕정좌위랑 역학왜학동거 배제번삼 학생일백칠십육명(在觀德亭左衛廊 譯學倭學同居 排除番三 學生一百七十六名)”이라 하여 다수의 학생들이 수학하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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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은 용담동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용담1동, 2동 구분을 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동에 살던지 2동에 살던지 간에 모두 용담동 사람들이라는 한묶음으로 그들을 엮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인 즉 오히려 행정적 구분을 짓고 인구수를 동별로 추정하는 것은 일련의 식자층들이란다. 실제로 제주시 주민들은 모두 용담을 하나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용담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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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에서 기우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제주시 용담2동의 한천(漢川) 하류에 있는 용소(龍沼)는 이름 그대로 용이 와서 머문다는 못이다.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 7년간 계속된 가뭄을 끝냈다는 고대장은 제주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대장본풀이」의 실질적인 주인공이기도 하다. 제주시 삼도동 무근성[陳城洞]에 고대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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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 아버지는 호조판서에 증직된 이덕손(李德孫)이다.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시 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였다. 1458년(세조 4) 지평이 되고 1459년(세조 5) 사직하였다가 1464년 선전관으로 복직하였다. 1466년 종부시정을 거쳐 구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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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1840년(헌종 6) 성균관 유생에게 황감(黃柑)을 주면서 치른 과거 시험인 황감제에서 부(賦)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문과의 초시와 복시를 치루지 않고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얻게 되었다. 1841년(헌종 7) 정시(庭試)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을 거쳐 승정원부승지를 지냈다. 1850년(철종 1) 6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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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현공(李玄功)의 선정을 기리는 비. 이현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여주목사를 지낸 뒤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현공은 1851년에 관덕정(觀德亭)을 중수(重修)하였고, 같은 해 제주향교(濟州鄕校)를 개축(改築)하였다. 서재(書齋)를 세워 제생(諸生)에게 늠료를 지급하여 숙식(宿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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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2동은 제주시의 중심지로서 제주목 관아가 있는 곳이며 제주특별자치도의 정치·문화 일번지라 할 수 있다. 삼도2동에는 우체국, 시청청사, 법원, 중앙의원 등 문화시설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제주도의 주요한 관공서가 있었던 곳이며, 상권이 번창했었다. 그러나 제주시의 시가지 개발에 맞물려서 1980년대 중반부터 인구이동이 나타나면서 상권이 쇠락해졌다고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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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정자.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1448년(세종 30) 신숙정 목사가 창건하였다. 좌우에 관아 시설이 위치해 있어서 관덕정은 제주도를 상징하는 건물이었으며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현재의 글씨는 1882년(고종 19) 박선양 목사의 글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관덕’이란 이름은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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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목을 맡아 다스린 정3품 외직 문관. 제주 목사는 형옥·소송의 처리, 부세의 징수, 군마(軍馬)의 고찰, 왜구의 방비 등 제주 지방에 대한 모든 행정을 집행하였던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한 관직이었다. 제주도에 목사를 파견한 것은 고려 1295년(충렬왕 21)부터 간헐적으로 이루어져왔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제주목의 설치는 1397년(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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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광무 2) 제주도에서 방성칠(房星七)이 주도한 민란. 방성칠은 본래 전라남도 동복군[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사람으로 남학교도였다.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실패 후 제주도로 건너가 화전민으로 정착해 살다가 1898년 제주 민란을 주도하였다. 화전세와 마장세 등 조세 수취 구조의 폐단을 개혁하려는 목적이었다. 1898년 2월 7일 방성칠의 주도로 광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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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민요는 노동요가 압도적으로 많고 사설이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다. 이들 노동요들은 척박한 자연 환경과 지리적 특성, 고려조부터 계속된 외침, 과도한 진상과 부역, 출륙금지령 등과 같은 자연적·사회적·역사적 배경에서 형성되었다. 제주 민요의 경우 여성들의 노동이 많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남성들의 노동이나 의례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여성 민요의 양과 질이 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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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었던 영화 상영관. 제주극장은 1944년 공연장 시설이 전무하던 제주 지역에 무성 영화와 유랑 극단의 공연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관덕정(觀德亭) 인근에 설립되었다. 1948년 10월 17일 정식 공연장으로 허가를 받아 공연과 영화 상영을 시작하였다. 이후 각종 예술 단체의 쇼나 군관민위원회, 학생들의 예술발표회 등 모두 공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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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제작된, 「제주도 메이데이」의 분석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주도 메이데이」는 제주 4·3 관련 무성 기록 필름으로 제주 4·3 발발 초기 제주 현지 상황과 미군정 및 경찰의 토벌 모습을 영상으로 전해 주는 유일한 필름이다. 또한, 「제주도 메이데이」는 국내 방송국에서 제주 4·3 관련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영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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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제주특별자치도의 행정 구역을 도(道)로 두었던 제도. 군정청 법률 제94호에 따라 제주도(濟州道) 설치를 1946년 7월 2일에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제1조. 제주도는 전라남도 관할에서 분리한다. 제2조. 제주도는 도(道)로서 전 권한·직무·직능 및 권리를 구비한 도를 구성한다. 그 도의 이름을 제주도라 칭한다. 제3조. 제주도는 북제주군 및 남제주군의 명칭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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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조선시대 제주목 관아. 제주목 관아는 조선시대 제주 지방 통치의 중심지로서, 지금의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들어서 있던 관아 시설을 말한다. 1991년부터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탐라국으로부터 조선과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기의 유구와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관아 시설인 동헌과 내아의 건물지 등이 확인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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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발행되었던 지역 민간 신문. 해방 후, 제주 지역에 미군이 상륙하기 전까지 일본군의 통제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제주민보』 창간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1945년 10월 1일 『제주민보』가 창간되었다. 창간에 참여한 언론인들은 일본군에서 발행한 『진중신문』의 취재·편집 활동을 함께 했던 김용수(金塎洙)·이기형(李琪亨)·고광태(高光泰)·문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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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삼국시대 탐라국 수부(首府)의 성곽으로 축성된 성터. 제주성은 삼국 시대 탐라국 수부의 성곽으로 축성되었으나 원래의 규모와 축성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읍석성(邑石城)의 둘레는 910보”라고 하였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읍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4,394척이고 높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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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남동에 위치한 제주시 중부 지역 공공 보건 의료 기관. 제주시 제주 보건소는 주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어 장수함에 따라 건강한 신체 활동과 질병 예방을 위한 양질의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주민이 필요로 하는 다양하고 실속 있는 의료 서비스와 건강 증진을 위한 여러 운동 프로그램을 발굴·운영하여 주민 모두가 편안하게 참여하고 실천 할 수 있도록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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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에서 도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전승되어 온 노래. 창민요는 넓은 지역에서 많은 사람에 의해 불린다 해서 통속민요라 칭하기도 하고, 놀이요의 성격을 갖는 민요와 한데 묶어 잡요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요즘에는 노래를 통해 얻는 즐거움이 춤추기나 윷놀이 등을 통해서 얻는 즐거움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아 노래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들을 가창유희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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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에는 매월 5일 간격으로 정해진 날짜에 열리는 3개의 민속오일시장이 있다. 이 중에서 제주시민속오일시장은 제주도 내의 재래시장으로는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시장이다. 제주시민속오일시장은 2일과 7일, 한림민속오일시장은 4일과 9일, 세화민속오일시장은 5일과 10일을 기준으로 각각 열리고 있다. 1990년대로 들어서서 여러 지역의 오일시장들이 사라지게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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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외도동에 있는 제주특별자치도 체육회 산하의 유도 경기 단체. 유도회 설립 및 운영을 통하여 등록 팀을 육성하고 우수한 선수 및 지도자를 양성하여 지역 유도 발전에 기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유도는 일제 강점기에 경찰의 호신술로 채택되어 1925년 제주경찰서에 연무장이 마련되면서 제주에 들어왔다. 이어 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의 전신인 제주농업학교에 연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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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라1동에 있는 대한체육회 산하 체육 단체. 체육 운동을 범도민화하여 학교 체육 및 생활 체육의 진흥으로 도민의 체력 향상과 건전하고 명랑한 사회 기풍을 진작 시킴과 아울러 경기 단체를 지원, 육성하고 우수한 경기자를 양성하여 도위 선양을 도모함으로써 민족 문화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주 4·3 사건이 진정됨에 따라 1951년 5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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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연동에 있는 제주특별자치도 전역의 행정을 총괄하는 지방 행정 기관. 제주특별자치도민의 편의와 복리 증진을 기본 목적으로 하여 첫째, 지방자치단체의 구역, 조직 및 행정관리 등에 관한 사무 둘째, 주민의 복지 증진에 관한 사무 셋째, 농림·상공업 등 산업 진흥에 관한 사무 넷째, 지역 개발 및 주민의 생활 환경 시설의 설치·관리에 관한 사무 다섯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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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시대 지방 관립 학교. 제주향교는 1392년(태조 원년) 현유의 위패를 봉안·배향하고, 제주민을 교화·교육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았고, 교수관 1명이 정원 70명의 교생을 가르쳤다.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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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출신의 서양화가. 제주의 풍경을 인상적으로 그렸으며 제주 자연의 순수한 색채를 찾는 화가이다. 또한 해녀 등의 풍물화를 통해 제주 여성의 활력 넘치는 건강미를 통해 이국적인 정서를 표현한 제주 현대 미술을 정착시킨 선구자 중 한사람이다. 일본 오사카시립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광복 후 김광추(金光秋)[1905~1983]·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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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에서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 사이에 있는 도로. 지방도 1135호선 은 총 29㎞이며, 구 북제주군 구간은 16.2㎞, 구 남제주군 구간은 12.8㎞이다. 〈표〉지방도 1135호선 현황 지방도 1135호선 은 중산간 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한 1967년부터 산업도로라고 하다가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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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 지역의 지방관이 왕에게 의례적으로 바친 특산물. 진상은 원래부터 납세의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각 도(道) 단위로 지방관이 한 달에 한 번씩 상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주·현에 그 부담이 배정되었고, 이것이 다시 각 민호에 배정되었다. 조선 시대 제주의 진상물 품목으로는 말·귤·전복·버섯·한약재 등을 들 수 있다. 『탐라지』(제주목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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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판매·배포의 목적으로 간행된 문서나 사진·회화 등의 저작물. 저작자나 출판사가 지식이나 정보·사상·감정·문화 등의 정신적 내용을 문자나 도형 등으로 기호화하고 처리해서 그 메시지를 도서 또는 서적이라는 인쇄 매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 전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독자들의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그 대가로 이윤을 추구하는 문화적, 경제적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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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이전 쌓았을 것으로 보이는 토석단(土石壇)의 터 칠성단(七星壇) 월대(月臺)는 삼도리(三徒里) 지역이 제주성 내에 자리 잡은 5~7세기 후반 무렵에 이르러 세워졌다고 한다. 칠성단 월대 터는 전설에 의하면, 고(高)·양(良)·부(夫) 등의 삼성(三姓) 시조가 일도·이도·삼도라 일컫는 세 개 지역의 땅을 나누어 차지할 때 북두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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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 1동 칠성 1로~칠성 2로에 있는 도로. 제주 지역에 근대적인 형태의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는 일제강점기 때였다. 당시 상점들은 관공서와 주택가가 몰려 있었던 제주시 중심부[당시 제주읍 성안]인 칠성로[本町通]와 관덕로[元町通]에 주로 분포되어 있었으며, 이 가운데도 유명 상점들이 거의 칠성로에 자리를 잡았고 이러한 연유로 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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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제주목에서 작성한 제주목 관아 시설 배치 상황 등이 나와 있는 지방 관찬문서. 편자 및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뒷표지 뒷면에 ‘제주 탐라방영총람 관덕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제주목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즉 수령을 보좌하는 육방 관속이 작성하여 신임 수령이 부임해 왔을 때, 해당 사항별로 수령에게 설명하거나 혹은 수령이 소속 읍을 순행할 당시에 향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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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숙종 때 제작된 제주도 지도와 그 서문. 1709년(숙종 35)에 제주목사 이규성(李奎成)이 제작한 지도 1과 병서 2로 이루어진 지도로, 세로 125㎝, 가로 98㎝의 크기이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의 제주 지도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어 1991년 6월 4일 제주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이 지도의 서문은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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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북쪽 해안지역. 제주시 탑동의 북쪽 해안은 수심이 1m~3.5m 정도이며, 공유 수면이 제1종 공동어장에 해당하며, 간조 때 마을 주민들이 해산물을 채취하고 수영을 즐기던 곳이었다. 이곳은 탑알, 또는 탑 아래라고도 하며, 무근성의 북쪽 바닷가 마을을 지칭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인가는 없고 대부분이 밭으로 되어 있었다.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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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7일에 제주읍내에서 조직되어 활동하던 청년 단체. 한라단은 민족 반역 행위를 한 친일파들을 응징하여 우리 스스로가 질서를 세우기 위해 결성되었다. 한라단은 일본 군대 등에서 귀환한 제주 읍내 청년들을 중심으로 1945년 9월 7일에 결성되었다. 김태륜(金台崙), 김기오(金基五), 김희석(金喜錫), 고정옥(高正玉)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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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1827년(순조 27) 전라우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1832년(순조 32) 2월 이예연(李禮延)[1767~1843]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834년(순조 34) 7월에 떠났다. 이후 1836년(헌종 2)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제주목사에 재임하던 1832년 연희각 동남쪽에 공제당(共濟堂)을 중수하여 군관(軍官)의 거주처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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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 향사당은 봄과 가을에 고을 사람들이 모여 향사음례(鄕射飮禮), 즉 활쏘기와 함께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향사당(鄕社堂)의 원래 이름은 향사당(鄕射堂)이었다. 여기서 ‘사(射)’는 공자가 “확상(矍相)의 들판에서 활을 쏘아 현인을 얻는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즉 옛날 어진 임금들이 몸소 인의(仁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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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1절 기념대회가 각 읍·면별로 치러졌고, 제주 북국민학교에는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3만여 명이 모였다. 제주읍에서는 북국민학교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곧바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관덕정을 거쳐서 서문통으로 시위대가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 경찰의 말굽에 어린아이가 다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흥분한 관람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곧바로 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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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양백(良伯). 아버지는 황수태(黃壽泰)이며,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1735년(영조 11) 증광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7년(정조 1) 3월 유혁(柳爀)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1778년(정조 2) 12월에 떠났다. 함께 재임한 제주판관은 김광현(金光鉉)[1722~?], 경내운(慶來運)[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