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2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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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敎 |
영어음역 | Bulgyo |
영어의미역 | Buddhism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호영 |
[정의]
부처님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
[개설]
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ārtha)의 깨달음에 연원한다. 전통적으로 그 깨달음의 내용은 연기(緣起)로 알려져 있다. 일체는 원인과 조건의 의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는 영원 불변한 독립적 실체로서의 궁극적 실재를 추구하는 기존의 종교·철학에 대한 혁명적 전환의 의미를 갖는다.
그의 사후에도 불교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그의 가르침에 대한 수많은 연구서-이를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라 한다-가 편찬되고,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는 새로운 불교운동으로 대승불교가 전개되었다.
기원전 6~5세기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스리랑카를 거쳐 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으며, 북방으로는 대승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도 전래되었다. 2세기 초 한역되기 시작한 『대승경전(大乘經典)』은 5세기 초 구마라습(鳩摩羅什)에 의해 대대적으로 번역되어 중국불교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중국불교는 이렇게 번역된 대승불교의 경(經)과 논(論)을 중심으로 화엄종, 천태종, 법상종, 정토종, 선종 등의 다양한 종파를 형성하며 발전하였다. 한국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4세기 후반 삼국시대 때이다. 고구려 372년(소수림왕 2년), 백제 384년(침류왕 원년), 신라 527년(법흥왕 14)이 그것이다.
그 뒤 한국불교는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국가불교로서 크게 융성하였으며, 유교가 지배 원리였던 조선시대에도 왕실과 민간에서 면면히 계승되었다. 한국불교는 선(禪)과 교(敎)를 융합하는 성격을 지니며 미륵신앙, 인과응보 사상 등을 통해 민간신앙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변천]
청주 불교의 역사에서 보살사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한때 융성했다 사라진 다른 사찰과는 달리 보살사는 창건 이후 단절되지 않고 법등을 밝혀 1,500년 청주 불교의 맥을 잇는 유서 깊은 고찰이기 때문이다.
보살사연혁, 보살사중수비에 의하면 보살사는 567년(백제 위덕왕 14) 창건된 이래 신라, 고려, 조선에 걸쳐 여러 차례 중창 또는 중수되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1530년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환선사(歡善寺), 선림사(仙林寺), 영천사(靈泉寺)가 모두 낙가산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보살사만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청주에는 남북으로 흐르는 무심천(無心川)을 사이에 두고 서쪽 들판인 운천동과 동쪽 산인 우암산(牛岩山)[338m]에 여러 사찰들이 건립되어 신앙의 요람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택지로 바뀐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1443번지[운천로14번길 50],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1447번지[운천로14번길 47]는 당시 상당한 규모의 절이 있었음이 유물과 사지(寺址, 절터)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특히 1982년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1443번지[운천로14번길 50] 운천동 사지에서 발견된 신라사적비(新羅寺蹟碑)는 686년에 건립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적비로서 불법을 찬탄하고 국왕의 덕을 칭송하며 삼한을 통일한 위업을 담고 있다. 또한 인근의 1447번지에서는 1970년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보살입상, 운천동 출토동종, 향로 등이 발견되고, 1984년에는 발굴이 실시되어 사지가 확인되었으나 그후 택지로 조성되면서 지하에 매몰되었다.
우암산(牛岩山)[338m]의 경우에도 통일신라 전성기에 이미 여러 사찰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암산(牛岩山)[338m] 토성 남문 아래인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 산33번지의 목우사(牧牛寺) 옛터에서는 신라시대의 아름다운 연화문 기와 등과 함께 조선시대의 기와조각도 발견되어 오랜 역사를 지닌 절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현재의 대한불교수도원, 관음사 그리고 청주대학교 안에 위치한 용암사도 모두 신라시대의 유물들을 간직하고 있어 우암산(牛岩山)[338m] 둘레의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한다. 특히 관음사 자리에서는 계향지사(桂香之寺), 월고사(月姑寺) 등의 글이 새겨진 기와가 나온 점으로 보아 이름과 시대를 달리한 여러 절들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우암산(牛岩山)[338m] 남쪽 아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탑동 251번지[탑동로 35]에 신라의 탑동 오층석탑이 현존한다. 탑동이라는 행정동의 명칭은 이 탑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고려 초기에 창건된 대표적 사찰은 용두사(龍頭寺)이다. 현재의 청주백화점 일대인 용두사 옛터(용두사지(龍頭寺址))에는 오래 전에 건물들이 들어서 가람배치는 확인할 수 없으나 현재 국보 41호인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이 남아 있어 당시의 위용을 전하고 있다.
당간에 새겨져 있는 글에 의하면 962년(고려 광종 13) 김예종(金芮宗), 김희일(金希一) 형제 양가의 발원에 의해 30단의 철통으로 60척 높이로 세워졌으나 현재에는 20단만이 남아 있으며 높이는 12.7m이다. 공주 갑사의 철당간 등과 더불어 철제 당간이 남아 있는 귀중한 예이다. 용두사는 고려 초에 창건되어 번영하였으나 고려 중기 수차에 걸친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의해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사찰로 흥덕사(興德寺)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운천동에 위치한 흥덕사(興德寺)는 ‘대중(大中) 3년’이라는 문자가 적혀있는 기와가 발견되어 849년(신라 문성왕 11)에 이미 불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85년 발굴된 한 쌍의 치미(지붕 용마루 양쪽에 올리는 장식 기와)는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유일한 예이며 높이가 135㎝에 이르고 있어 당시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흥덕사(興德寺)는 고려시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가 이루어진 곳이라는 점에 더욱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백운화상이 초록한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 1377년 이곳에서 금속활자로 주조되어 인쇄된 것이다. 현재 사적 제315호로 지정되어 금당과 삼층석탑이 복원되었으며, 사지 옆에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세워져있다.
이밖에 고려시대 옛 절터로는 우암산(牛岩山)[338m] 정상부분의 우암사지(牛岩寺址), 수동의 흥천사지, 천흥사지 그리고 현 향교자리의 사지, 사직동 사뇌사지 등이 있다.
조선시대 불교활동으로는 임진왜란 때의 의승군을 거론할 수 있다. 1592년 8월 1일 영규대사(靈圭大師)[?~1592]는 의승을 이끌고 청주성 전투에 참가했으며, 이 전투는 육전에서 조선이 이룬 최초의 승리였다. 그의 전적비가 중앙공원(中央公園)에 세워져 있다. 무심천(無心川) 변의 용화사가 창건된 것도 조선말인 1902년이다.
그러나 미륵보전에 안치되어 있는 청주 용화사 석불상군(보물 985호)은 운천동, 사직동 일대에 방치되어 있던 석불상들을 옮겨온 것으로 조성연대가 각기 다르나 대체로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현황]
청주청원불교연합회에 등록되어 있는 청주시 사찰은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의 종단에 소속된 사찰과 별도법인으로 되어있는 개별사찰 등을 합하여 56개소이다. 보살사, 보현사, 복천암, 연화사, 용암사, 용화사, 청룡사는 전통사찰보존법에 따라 역사적 의의를 지닌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있다.
언론기관으로는 1997년에 개국한 불교청주방송, 2003년 창간한 충청불교신문사가 있다. 사회복지사업으로는 조계종 선재원이 북부종합사회복지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은 노인전문병원으로 청주광명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보현사는 장애아동을 위한 보현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선학원에서는 충북불교문화회관에 광명문화센터를 운영하며 다양한 어린이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신행단체로는 청주불교금강회, 청주불교실업인회 등이 있으며, 청주운전기사불자연합회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각 대학에 불교학생회가 있으며, 충북교수불자회가 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