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637
한자 淸州城戰鬪
영어음역 Cheongjuseong Jeontu
영어의미역 Cheongjuseong Bat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석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연도/일시 1592년 8월 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청주성
관련인물 조헌(趙憲)[1544~1592]|영규대사(靈圭大師)[?~1592]|박춘무(朴春茂)[1544~1611]|이옥

[정의]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조헌(趙憲)[1544~1592]의 의병, 영규대사(靈圭大師)[?~1592]의 승병, 박춘무(朴春茂)[1544~1611]의 청주 의병 등이 합군하여 왜군에게 함락 되었던 청주성을 탈환한 전투.

[개설]

1592년(선조 25)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의해 청주성이 함락되었다. 이때 옥천에서 일으킨 조헌의 의병과 영규(靈圭)대사가 이끄는 승병 그리고 박춘무의 청주 의병이 힘을 합쳐 청주성을 공략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청주성을 회복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육전 최초의 승전보였고, 초기 의병이 거둔 주요 승리의 하나였다.

또한 호남과 호서 탈환의 전기가 되었으며, 관군과 의병의 사기를 북돋았음은 물론 관군이 명군과 함께 반격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하는 등 전사적 의미가 큰 의병활동이었다.

[발단]

청주성 전투가 있던 시기의 전쟁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왜군은 7월 17일 명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이 지휘한 제1차 평양성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명나라 군대의 참전에 따라 장기농성전(長期籠城戰)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이에 필요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호남으로의 진출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호남 입성의 교두보인 금산과 청주를 주목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기 시작하였다.

[경과]

평양성 전투 이후에 왜군은 장기농성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식량을 구할 수 있는 호남 진출을 생각하였고, 그 중간거점으로 청주를 설정하였다. 이에 6월 23일경에 청주성을 점령하게 된다. 이에 당시 충청도 방위책임자인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은 방어사 이옥과 조방자, 윤경기(尹慶祺)로 하여금 청주성을 공략하게 하였으나 이옥이 지휘하는 관군은 청주성 공략에 실패하였다.

이 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은 이옥을 대신하여 영규대사에게 지휘관의 책임을 위임하였다. 영규대사는 7월 15일 즈음에 청주성의 서문 밖에 이어져 있는 빙고현(현 모충동 고개)에 도착하여 의병진을 셋으로 나누어 주둔 시킨 후 왜군의 상태를 파악하였다. 그리고 7월 29일 대대적인 공격을 하기로 하고 주변 관군들에게 청주성을 공격하도록 요청하였다. 7월 29일 승병과 관군 연합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하였으나 회복에 실패하였다.

한편 조헌고경명(高敬命)과 함께 금산 수복을 계획하였으나, 고경명의 전사로 인하여 계획을 수정하게 되었고, 왜군의 북상에 대비하기 위해 청주로 향하였다. 이 후 7월 29일 빙고현에서 영규대사의 승병군과 합류하게 된다. 또한 박춘무의 청주 의병도 청주성을 향해 진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써 연기현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인 이옥이 청주성으로 진격하고,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들도 안심사에 집결하였다가 빙고현에 진군함으로써 관의병의 합군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조헌이 직접 지휘하게 된다. 이들 관의병은 청주성을 되찾기 위해 8월 1일 새벽에 각각 서문과 남문으로 나누어 공격을 개시하였다.

[결과]

8월 1일 전투는 종일 계속 되었는데, 기상 악화로 인하여 관의병은 일단 후퇴하여 관망하였는데, 싸울 의지를 잃은 왜군이 스스로 후퇴함으로써 관의병들은 피를 흘리지 않고도 청주성을 되찾게 된다.

[의의와 평가]

청주성 전투는 호서지역의 의병들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청주성을 탈환하여 근왕(勤王)을 이행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따라서 호서의병들이 청주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청주성을 회복한 것은 상당한 전략적 효과를 거둔 것으로 그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청주성 전투 결과 얻은 청주성의 회복은 단순히 청주 지역만의 회복이 아니라, 왜군이 호남지역과 충청우도(忠淸右道)로 진출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점을 빼앗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침략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고 반대로 국토회복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데 큰 의미를 들 수 있다.

둘째, 청주성 전투에서는 의병과 승병 그리고 관군이 연합하여 승리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종전까지 관군은 일본군과의 격전에서 패배 내지는 미리 도망했었고, 의병과는 갈등 관계를 초래하여 합일된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였지만 청주성 전투에서는 대규모 연합세력을 구성함으로써 승리하였던 것이다.

셋째, 청주성 전투에서는 이 지역 출신의 의병들이 직접 참여하여 승리하였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이들은 청주성의 익숙한 지형을 이용해 작전을 전개함으로써 보다 유리했으며 전투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데 용이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청주 지역 출신의 의병은 자기 지역에서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친족의 참여와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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