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592 |
---|---|
한자 | 歷史 |
영어음역 | yeoksa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집필자 | 송만오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의 선사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고대]
남원의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된 바 없다. 삼한 시대에는 마한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지리산을 경계로 진한과 변한의 국경 지역에 위치한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이와 관련해 마한이 달궁(達宮) 지방에 별궁을 두고 정장군(鄭將軍)과 황장군(黃將軍)을 파견해 진한·변한의 침략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백제 온조왕 34년(16)에 고룡군(古龍郡)이라 하였다가 196년(초고왕 31)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개칭하였으나 평안도 지방에 한사군(漢四郡)의 대방군이 설치되자 220년(구수왕 7)에 남대방군(南帶方郡)으로 바꾸었다.
660년(무열왕 7)에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멸망하자, 이 지방에 대방도독부(帶方都督府)를 두고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를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使) 겸 도독으로 삼았다.
685년(신문왕 5) 전국에 5소경(五小京)을 설치할 때 그 중 하나인 남원경(南原京)이 설치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대방을 남원이라 고쳤다. 828년(흥덕왕 3)에는 증각대사(證覺大師)가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하였고, 875년(헌강왕 1)에는 도선(道詵)이 선원사(禪院寺)를 창건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태조 23) 남원부(南原府)로 개칭되었고, 현종 때 지방제도 정비를 거쳐 임실(任實)·순창(淳昌) 등 2개의 속군(屬郡)과 장계(長溪)·적성(赤城)·거령(居寧)·구고(九皐)·운봉(雲峰)·장수(長水)·구례(求禮) 등 7개의 속현(屬縣)을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명종 때에는 공주에서 망이(亡伊)가 난을 일으키자 남원·완주 등 호남 일대에서 이에 호응했는데, 그 때 윤위(尹威)는 남원 지방의 반란군을 평정한 공으로 남원부백(南原府伯)이 되었으며, 그가 남원윤씨의 시조이다.
1310년(충선왕 2) 대방군으로 환원했다가 1360년(공민왕 9) 다시 남원부로 복구되었다. 1379년(우왕 5) 왜구가 경상도 지방을 노략한 뒤 함양을 거쳐 운봉의 인월리에 주둔하였다. 그 때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이던 이성계(李成桂)는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운봉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사살하는 등 황산대첩(荒山大捷)을 거두었다.
[조선]
1410년(태종 10) 대복사 부근에 남원향교가 창건되었다. 1413년(태종 13) 남원도호부로 되어 1군 18현을 관할하였다. 1418년 황희(黃喜)가 세자 책봉에 이견이 있어 남원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때 광통루(廣通樓)를 세웠으며, 1444년(세종 26) 전라도관찰사였던 정인지에 의해서 광한루로 개칭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남원도호부의 호수는 1,300호, 인구는 4,912명이었다. 세조 때 진관 체제가 성립됨에 따라 남원에도 진관이 설치되었으며, 남원부사가 첨절제사를 겸임해 담양·순창 등을 거느렸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쳐들어오자 의병장 양대박(梁大樸)은 운암에서, 조경남(趙慶南)은 운봉의 팔량치(八良峙)에서 각각 왜군을 대파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중에 변사정(邊士貞)은 교룡산성의 수성장이 되어 산성을 크게 수축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성이 함락되었으며, 그 때 용성관·향교·만복사·광한루 등이 모두 불탔다. 1654년(효종 5) 남원에 전라좌영을 설치했으며, 1739년(영조 15) 양찬규(梁纘揆)의 반란으로 인해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750년 다시 남원부로 복구되었다.
[근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김개남(金開男)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교룡산성을 거점으로 활약하다가 여원치(女院峙)에서 관군에게 패하였다. 1896년 지방관제 개편 때에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개편되었는데, 그 때 전라남도의 관찰부를 남원에 두었다. 그러나 이듬해 전라북도에 편입됨에 따라 관찰부는 광주로 옮겨졌다.
1906년에는 의병장 양한규(梁漢奎)가 헌병대를 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1914년 남원도호부가 폐지되었고 운봉군을 통합해 남원군이 되었다. 이때 남원군은 19개 면을 관할했으며, 인구는 약 9만 2,000여 명에 이르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3일 이석기(李奭器)의 영도 하에 많은 면민들이 만세 운동에 참가했으며, 그 뒤 5월까지 19차례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1931년 남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듬해 전주~남원간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근대의 인물로는 이 지방 3·1운동 선구자인 이석기를 비롯해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백용성(白龍城)과 일제의 침략에 대해 자결로 항거한 이태현(李太鉉), 통감부를 습격했던 박석규(朴錫奎) 등이 있다.
[현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7월 24일 공산군에게 점령당했다가 9월 28일 유엔군의 진주로 다시 수복되었다. 이 때 각급 관청과 학교·교회·주택 등이 불탔으며, 9·28 수복 후에는 패주하던 공산군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인근 주민을 약탈하는 등 그 피해가 컸다. 당시 청년·학생들이 경찰을 도와 공비 토벌에 참가하였다.
1956년 왕치면이 남원읍에 폐합되었으며, 1981년 남원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남원군과 분리되어 별도의 행정 구역을 이루었다. 1985년 7월 대강면 수홍출장소를 폐지, 1990년 4월 송동면 양평리 일부가 금지면 상신리에 편입되었다. 1995년 도농 통합에 따라 남원군과 남원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남원시가 되었으며, 같은 해 3월에 운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98년 5월 1일에는 동면이 인월면으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