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3128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현길 |
[개설]
임진왜란 중 충주는 가장 희생이 많았던 싸움터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신립 장군은 탄금대 앞에서 달천과 남한강을 뒤로 하여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8,000여 명의 조선군 중 두서너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할 만큼 희생이 큰 전투였다. 또한 충주읍성에 있던 많은 사람들, 즉 사민(士民)과 관속(官屬)들이 당대의 명장인 신립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음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희생이 더욱 컸다고 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조령의 골짜기를 이용하여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신립은 조령을 포기하고 탄금대 앞의 들을 택하였다. 탄금대는 천연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신립은 천연의 해자를 최대한 이용하여 왜군을 탄금대 앞의 넓은 들로 유인하여 철기로 일격을 가하고자 하였고, 급하게 편성한 훈련받지 못한 병력으로는 왜군을 당할 수 없음을 알고 옥쇄(玉碎)를 각오한 배수진으로 최후의 일전을 결행하고자 한 것이었다.
[임진왜란과 초기의 대응]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저녁 5시경 16만 왜군이 갑자기 부산항에 상륙하면서 7년의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국경 지대에서 약간의 소요는 있었으나 200여 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어 왔다. 이런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명나라를 치겠으니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는 등 전쟁의 조짐을 느낄 수 있는 통보가 있었으나, 일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고 경계심도 갖지 않았다.
또한 일본에 갔던 통신사의 보고에서도 정사 황윤길(서인)과 부사 김성일(동인)의 보고 내용이 달랐다.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의 말을 인심을 동요시키려는 언동이라 하여 취하지 않고, 그러하지 않다는 부사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왜군은 전국시대를 겪는 동안 양성된 정예군이었으며, 수적으로도 압도적이었다. 또한 새로운 병기인 조총(鳥銃)으로 무장하고 있어 활과 창만을 갖고 있었던 조선과는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부산이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떨어졌고, 이튿날 동래가 함락되니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군민(軍民)과 더불어 끝까지 항전하다가 순절하였다. 조선은 전쟁 초기부터 준비 없이 왜군을 맞아 속수무책이었다. 첫 싸움에서부터 지휘자인 경상좌병사 이각(李珏)과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이 진(鎭)을 버리고 달아나는 상황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왜군은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후 중로·좌로·우로의 세 길로 나누어 서울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중로의 1번 부대는 소서행장(小西行長)·종의지(宗義智)·송포진신(松浦鎭信) 등이 거느린 왜군 18,700명이 부산에서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으로부터 상주를 거쳐 조령에 이르렀다. 좌로의 2번 부대는 가등청정(加藤淸正)·과도직무(鍋島直茂)·상량뇌방(相良賴房) 등이 거느린 22,800명이 부산으로부터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을 거쳐 조령을 넘어 충주에서 1번 부대와 합류하였다. 우로의 3번 부대는 흑전장정(黑田長政)·대우길통(大友吉統) 등이 13,000명을 이끌고 김해·성주 무현강을 건너 지례·금산을 거쳐 추풍령을 향하여 북상하고 있었다. 후속 부대가 계속하여 9번 부대까지 이어졌으니 총 16만의 대군이었다.
4월 17일 새벽 부산에서 달아난 박홍이 서울에 당도하여 왜군 침공에 대한 급보를 전하였다. 잇달아서 경상도의 여러 고을이 차례로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달되고 있었다. 조정은 물론 백성들도 공포 분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대책을 협의한 끝에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적의 주 공격로인 상주 방면의 중로로 보내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죽령 방면인 좌로로,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하여 추풍령 방면인 서로로 보내어 적을 막도록 하고, 조방장 유극량(劉克良)은 죽령을, 조방장 변기(邊璣)는 조령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출발의 명을 받은 이일이 정병(精兵) 300명을 뽑기 위해 병조에서 골라 놓은 선병안(選兵案)을 보니 시정의 백도(白徒, 훈련을 받지 않은 장정들)·서리(胥吏)·유생(儒生)들이 반을 차지했다. 이들마저 병역을 면하려고 하소연하는 자들로 꽉 차 있어 보낼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3일간이나 지체되었고, 하는 수 없이 군관 60여 명만 데리고 먼저 출발시키고 별장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뒤따르게 하겠다고 할 형편이었다.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이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되어 군정(軍政)을 전담하게 되었고, 신립(申砬)이 전장의 총지휘관인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임명되어 이일의 뒤를 이어 충주 방면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신립도 데리고 갈 군관이 없어 유성룡이 모집한 80여 명을 겨우 얻어서 떠나야 했다. 당대의 명장인 신립과 이일은 자신이 거느릴 군사가 없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방어군 선발대로 파견된 이일이 변변한 군사도 거느리지 못하고 문경(聞慶)에 도착하였을 때, 문경의 군사와 관리들은 모두 대구로 내려간 뒤라 고을이 텅 비어 있었다. 왜란이 일어나자 경상감사 김수(金晬)가 『제승방략(制勝方略)』에 의하여, 조령 밑 문경 이남의 각 고을 수령들에게 명하여 대구로 군사를 집결시키고 원야(原野)에 노숙하면서 순변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왜군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진이 무너지고 수령들은 단기(單騎)로 도망하니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일은 그대로 함창(咸昌)을 거쳐서 4월 23일에 상주(尙州)에 도착하였다. 상주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를 맞으러 간다는 핑계로 산골로 달아나 숨어 버렸다. 이일은 군사가 없음을 책망하며 판관 권길(權吉)을 참(斬)하려 하였다. 권길은 군사를 모아오겠다고 하고 밤새 인근 촌락을 돌아다니며 농민 수백 명을 모집해 왔다. 이일은 창고 곡식을 풀어 흩어진 백성 수백 명을 모아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서울에서 데려온 장졸을 합하여 800~900명 정도였다. 이일은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진 군사들에게 대오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상주의 북쪽 냇가에서 훈련을 시키면서 진을 치고 있었다.
왜군은 4월 24일 선산(善山)을 거쳐서 상주 남쪽 20리에 있는 장천(長川)에 진을 치고 있었다. 왜군 출현을 목격한 개령(開寧) 사람이 적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자 이일은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이유로 참하였다. 이러다 보니 이일에게는 척후도 없었지만 적의 동정을 알리는 백성들도 없게 되었다. 왜군은 4월 25일 정오경에 상주성에 진입하여 불을 질렀다.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군관 박정호(朴挺豪) 등으로 탐지케 하였으나, 박정호도 숲에 잠복했던 적에 의해 사살되었다.
왜군이 포환(砲丸)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로 에워싸니 조선군은 겁에 질려 활을 쏘면서도 한껏 당기지도 못하고 크게 흔들렸다. 이일은 곧바로 말을 달려 도망하였으며 조선군 300여 명이 참수되는 등 모두 섬멸되었다. 도망한 이일은 문경에 도착하여 패전한 상황을 “오늘 신과 싸운 적군은 신병(神兵)과 같아서 감히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신은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으로 여기 대죄(待罪)하나이다.”라 장계(狀啓)하였다. 그리고 이일은 조방장 변기(邊璣)가 지키는 조령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마침 신립이 충주에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충주로 갔다.
[신립의 작전 구상]
신립이 김여물(金汝岉)을 종사관으로 삼아 온 나라의 기대를 안고 충주로 떠날 때 선조는 보검을 주면서 “이일 이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참하라.”고 격려하였다. 그러나 출발하기에 앞서 신립이 군사를 모집할 때 한 사람도 따르는 자가 없었다. 도체찰사 유성룡이 자신이 모집한 80여 명의 군관을 데리고 먼저 떠나도록 하였으니, 도성의 무사(武士)·재관(材官),·외사(外司)의 서류(庶流)·한량인(閑良人)으로 활 잘 쏘는 자를 군사로 편입시키고, 조관(朝官)으로 하여금 각기 전마(戰馬) 한 필씩 내도록 하여 도움을 받아 출발하였다. 또한 가는 도중의 고을에서 군사를 징발하면서 4월 26일 충주에 도착하였으니, 신립이 거느린 병력은 충청도 군·현의 군사를 합하여 8,000여 명이었다.
충주에 도착한 신립은 우선 단월역(丹月驛) 앞에 주력군을 주둔시키고, 충주목사 이종장(李宗張)과 종사관 김여물 및 막하 장령 수 명을 거느리고 조령으로 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이 “왜군은 큰 병력이고 우리는 적기 때문에 정면으로 적과 싸우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조령의 천험(天險)을 이용하여 굳게 지키지 아니하면 적에게 점령당하는 바가 될 것이니, 나아가 조령에 이르러서 산중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적이 골짜기에 들어오기를 기다려 양쪽 언덕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쏘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봅니다. 만약 적의 예봉(銳鋒)을 당하지 못한다면 물러나 서울을 호위하는 것도 또 한 가지 계책이라 생각됩니다.”라고 의견을 개진하니, 충주목사 이종장 이하 수행한 여러 사람이 이 의견에 따랐다.
그러나 신립은 한동안 골몰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 지역은 좁은 골짜기라서 기마병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을 것이요.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로 맞아들여서 철기로 족치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오.”하고는 이어서, “적군은 바다를 건너오고 또한 장구한 행군으로 북상하는 과정에서 매우 피로하였을 것이요. 따라서 이들을 넓은 들판으로 유인하여 철기로 대응하면 능히 저항하지 못할 것이라 믿소.”라 하며 단월로 되돌아왔다. 이미 신립은 탄금대를 등진 배수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주에서 패하여 온 이일은 단월에서 신립 앞에 꿇어앉아 죽기를 청하였다. 신립이 “좋소. 하지만 적의 형세나 물어봅시다. 어떠하오?”하니, 이일은 “우리는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으로 대항할 수 없는 적을 맞게 된 것입니다. 감당하기 힘든 적이었으며,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고 하면서 이어 “이번 왜병들은 경오년(1510, 삼포 왜란)과 을묘년(1555, 달량포 왜변)의 그것과는 견줄 바가 아니며 또 북쪽 오랑캐같이 쉽게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립은 크게 책망하며 “내가 장군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참수하려고 하였으나 전날 공훈을 생각하여 종군하면서 스스로 왜적을 막아 공을 세워 속죄토록 기회를 줄 것이니 몸을 바쳐 충의를 다하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신립은 이일과 조방장 변기를 선봉으로 삼아 단월을 지키도록 하고 충주성으로 들어와 작전 구상을 하였다. 조령을 포기하고 탄금대 앞의 들을 택한 것은 신립의 말과 같이 기마 전법을 이용하려는 뜻도 있었으나, 조령 방어를 위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도 생각된다. 이 무렵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주력 부대는 4월 27일 새벽 상주를 떠나 함창을 지나 저녁에 문경에 당도하여 현감 신원길(申元吉)을 죽이고 문경에서 일박한 후 4월 28일 새벽 4시경에 조령을 넘기 시작하였으므로 단월의 병력을 조령까지 이동·배치시킬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4월 27일 조령 방면으로 보냈던 척후장 김효원(金孝元)과 안민(安敏) 등이 달려와 “적의 선봉이 이미 다가왔습니다.”라 보고하였다. 신립은 잠시 생각하다가 홀연히 성을 뛰쳐나가 단신으로 적정을 살피고 밤에 돌아와서는 척후가 군중을 놀라게 하고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하여 목을 베었다. 척후가 적의 척후병을 적의 주력 부대로 잘못 보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군졸들의 동요를 막으려는 의도가 컸었다고 보인다. 신립은 충주성 안에서 작전 구상을 하고는 또한 조정을 안심시키고자 “적은 아직 상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라고 허위로 장계를 올렸다. 이는 스스로 최후의 결의를 다지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신립의 작전은 탄금대와 달천을 배후로 한 배수진이었다. 신립은 앞서 주장한 대로 피로한 적군을 탄금대 앞의 넓은 들로 유인하여 철기로 일격을 가하고자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이일에게서 들은 적세를 생각할 때 급하게 편성한 훈련받지 못한 병력으로는 당할 수 없음을 알고 옥쇄(玉碎)를 각오한 배수진으로 최후의 일전을 결행하고자 한 것으로도 생각된다. 이는 서울로 향하는 왜군을 하루라도 지연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보인다. 신립은 4월 28일 아침 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탄금대로 나아가 진을 치고 왜적을 맞이하였다.
[탄금대와 왜군의 공격로]
탄금대는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사이에 솟아있는 산으로 본래는 섬이었다. 북쪽으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달천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충주천과 접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탄금대에서 가장 높은 해발 106m 내외의 봉우리가 동북쪽으로 급히 낮아져서 단애를 이루고 있으며, 이 단애를 끼고 남한강 물이 좁은 도랑과 같이 흘러 샛강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사면이 물로 감싸여 있는 섬이다.
그 좁은 도랑을 건너서는 해발 70m 전후의 편평한 ‘섬들’이 동북쪽으로 길게 남한강 변을 이루고 있다. 그 동쪽으로 기다란 능암늪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샛강으로 본래는 남한강에서 갈라진 물줄기로 ‘섬들’과 ‘탄금대’를 끼고 남쪽으로 흘러 충주천에 합쳐져서 서쪽의 달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지역 고로(古老)들의 말에 의하면 평상 시에는 샛강의 물이 남쪽으로 흐르지만 큰 장마가 져서 시내 쪽의 물이 많으면 역류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섬들은 두 강물이 합쳐지는 곳에 형성된 일종의 삼각주라 하겠다.
왜군은 4월 28일 새벽 4시경에 문경을 출발하여 안보역(安保驛)을 아침 8시경에 지나, 정오경에 충주의 남쪽 단월역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무렵 충주목사 이종장과 이일이 모두 척후로 전방에 나가 있다가 적에게 차단되어 정세 보고가 끊어졌음으로 신립은 왜군의 동향을 알지 못하였다. 단월역에서 왜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탄금대를 향하여 포위하여 들어갔으니, 그 세가 풍우와 같았다. 주력 부대인 중군은 곧바로 충주읍성으로 들어가고, 좌군은 달천강 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은 동쪽의 산을 따라 북쪽으로 진출하여 상류의 강을 건넜다고 하니 삼면으로 포위하여 좁혀온 것이라 하겠다.
왜군의 진로를 현재의 지형에 따라 추정해보자. 소서행장이 이끄는 중군은 7,000명의 주력군으로 싸리고개를 넘어 곧바로 관아인 성내(城內)로 들어가 충주읍성을 장악하고 서쪽의 탄금대로 향하였다고 하니, 지금의 시내에서 탄금대로 가는 주 도로였을 것이다. 좌군의 종의지가 이끌던 5,000명의 왜군은 단월역에서 달천의 우측 강변을 따라 탄금대로 직진한 것으로 보이며, 우군의 송포진신(松浦鎭信)이 거닐던 3,000명의 왜병은 지금의 소로를 이용하여 ‘도장골[道庄洞]’로 넘어가서 관주동으로 하여 호암동을 지나 용산동·안림동의 남산과 계명산의 기슭을 따라 북쪽으로 만리재를 넘고 금릉천을 건너 탄금대 동북쪽으로 진출하였을 것이다.
이 부대는 충주의 동쪽 외곽의 남산과 계명산록에 복병이 있는지 탐색하면서 탄금대의 후방으로 나가기 위한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이외에 왜장 유마청신(有馬晴信)·대촌희전(大村喜前)·오도순현(五島純玄) 등이 거느린 예비대 3,700명은 충주성에 대기하였으니, 왜군은 모두 18,700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신립의 진지와 최후의 싸움]
왜군은 세 갈래로 탄금대를 포위하며 공격해 왔다. 신립은 탄금대와 서쪽의 달천을 등지고 남쪽의 충주천과 동쪽의 금릉천의 외곽 지대인 넓은 들에 왜군 진로에 따라 아군을 분산·배치하여 1차 방어진을 쳤을 것이다. 탄금대를 둘러싼 충주천과 금릉천 및 샛강은 천연의 해자이다. 신립은 무모한 배수진을 친 것이 아니라 천연의 해자를 최대한 이용하여 1차 방어 진지, 2차 방어 진지, 3차 방어 진지까지 감안한 작전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우선 1차 방어 진지가 무너지면 자연적으로 2차 방어 진지가 형성되고, 다음으로 최후의 방어 진지가 형성되도록 구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1차 방어 진지는 논이며 수초가 우거진 습지였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는 “군사를 이끌고 탄금대에 나가 주둔하여 강을 등지고 진을 쳤는데 앞에는 많은 논이 있어서 실제로 말을 달리기에는 불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상 이 일대가 논이었기 때문에 음력으로 4월 하순경(4월 28일)에는 모내기를 위하여 물을 대고 있어 말뿐 아니라 사람들도 활동하기에 적절치 않은 상태였을 것이다.
적의 공세는 치열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창날이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신립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곧장 말을 채찍질하여 충주성으로 향하여 나아가니 군사들은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흩어지고 숨어버렸다. 성중의 적이 호각 소리를 세 번 내고 일시에 나와 공격하니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며,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함으로 신립이 진을 친 곳으로 달려갔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매우 처절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신립은 1차, 2차, 3차에 걸쳐 적진을 향하여 출격하였으나 적세에 밀려 적의 주 공격로인 금릉천의 제1진지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자 자연히 내를 건너 금릉천(해자)을 이용하는 제2진지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곳은 왜군의 주력인 중군의 공격로로서 금릉천과 샛강 사이로 지금의 ‘칠지’와 ‘새말’이 있는 지역이다. 그리 넓지는 않으나 충분히 말을 달릴 수 있는 지형이다. 신립은 이곳을 주 전쟁 터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이곳을 중심으로 주력군을 맞이하여 시내 쪽으로 여러 차례 출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왜군의 공세에 밀려 샛강을 건너 탄금대 밑으로 몰리게 되었으니, 더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저항선이었다.
신립의 배수진은 한(漢)나라 한신(韓信)의 고사를 따랐다고 하였으니, 한신의 휘하는 고도로 훈련된 정예병이었기 때문에 성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이라고 할 보통 사람에게는 어차피 죽을 바이니 일대일로 상대하겠다는 용기가 나지 못하는 법이다. 뒤에 물이 있어 빠져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앞에서 총·칼을 겨누고 위협하면 담력이 약해서 상대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다가 물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하니 실제로 적과 대치하여 싸울 수 있었던 군사들과 이를 지휘할 장수들이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이다. 당대의 명장 이일도 샛길로 도망하였으니 할 말이 없다. 이때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한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의 내용을 옮겨본다.
“이미 적이 사면에서 들이닥쳤다. 그곳은 마을 거리가 좁고 좌우에 논이 많아서 수초가 엉키어 말을 달리기에 불편하였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적이 우리 군의 좌우를 포위해 오는데 그 세가 풍우와 같았다. 한 길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오고, 한 길은 강을 따라 내려오는데 포성이 진동하고, 철환(鐵丸)이 비 오듯 하고, 먼지는 하늘을 덮고, 함성은 산을 흔들었다. 신립이 김여물에게 급히 장계를 초하게 하니, 김여물이 갑주를 입고 궁시를 허리에 차고도, 붓 놀리기를 물 흐르듯 하여 한 자도 그릇됨이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적세가 더욱 급하여 점점 포위하니 사면에 길이 없었다. 신립이 황급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말을 채찍질하여 적진에 출동하기를 두 세 번하였으나, 나아갈 수 없어 도로 강가로 달려오는데 김여물이 말을 타고 앞에 있어 거의 얕은 여울에 이르렀다. 신립이 김여물을 부르며 ‘공을 살려볼까 하오.’ 하니 김여물이 웃으며 ‘내가 어찌 죽음을 아낄 사람이겠소.’ 하고는 다시 달려 탄금대 밑에 이르러 신립과 더불어 수십 명을 쳐 죽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흔들려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군자기계가 일시에 다 동이 났다. 적병이 신립을 추격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모든 군사가 강물에 뛰어 들어갔는데 흐르는 시체가 강을 덮어 내려갔다. 이일은 동쪽 산골을 거쳐 탈출하였다.”
이때 상황을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는 “적이 포위하여 오자 신립은 포위를 뚫고 달천 월탄(月灘)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 빠져죽었다. 그의 종사관 김여물과 박안민(朴安民)도 함께 빠져 죽었다.”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신립에게는 누이의 아들로 따라다닌 자가 있었는데, 도망하려 하자 신립이 노하여 ‘네가 어찌 살려고 하느냐.’며 머리를 붙잡고 함께 빠져 죽었다. 장사(壯士)로서 빠져나온 사람은 두서너 명에 불과했다. 이일은 샛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가 왜적 두 세 명을 만나 한 명을 쏘아 죽여 수급을 가지고 강을 건너 치계(馳啓)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처음으로 신립이 패하여 죽은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8,000명의 조선군 중 두서너 명만이 살아남고 모두 순국하였으니 이는 신립이 옥쇄(玉碎)할 각오로 최후의 싸움을 결행한 사실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상에서 보아 최후의 싸움은 ‘탄금대 아래’ 합수 지점이 되고 이곳을 달천 월탄이라고 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왜군이 충주천과 샛강을 건너 공격의 폭을 좁혀오자 조선군이 그 세에 밀려 탄금대 밑을 끼고 돌아 지금의 탄금대교가 있는 달천과의 합수머리로 밀려가다가 물에 빠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의 기록에는 충주의 싸움 터를 달천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달천이야말로 배수진으로 한 최후의 싸움 터라고 할 것이다.
이때 희생된 사람은 일본 측의 기록에 의하면 왜군에 의해 살해된 자가 3,000여 명, 포로로 잡힌 자가 수백 명이라고 하였으니, 나머지는 모두 강물에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충주읍성에 있던 많은 사람들, 즉 사민과 관속들이 당대의 명장인 신립이 와서 주둔하고 있음을 믿고 피난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고을보다 더욱 희생이 컸다는 사실도 생각해 볼 일이다.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
임진왜란 중 충주는 가장 희생이 많았던 싸움 터였다. 예부(禮部)에서는 1593년(선조 26) 4월에 전사한 관군의 위령제를 위해 민충단(愍忠壇)을 설치하고, 11월 24일에 충주의 달천 등 큰 싸움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해당 지방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후 종종 달천에서 전사한 자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며, 특히 임진년에도 지냈음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793년(정조 17) 3월 20일에 “충주의 충신의사단에 절개를 지켜 순절한 날짜에 제사를 지내라.”는 명에 따라 제사를 지냈으니 충주 달천에는 충신의사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