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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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아버지는 김정실(金鼎實)이다. 1763년(영조 39) 7월 제주에서 심래복(沈來復)[?~1763], 조영득(趙榮得), 유동혼(柳東渾) 등이 영조를 내쫓고 왕족인 이훈(李壎)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역모가 발각되었다. 이에 조정은 1763년 10월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이수봉(李壽鳳)[1710~?]을 제주위유어사(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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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발을 시조로 하고 김인충을 입도조로 하는 제주의 세거 성씨. 나주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왕자 김황(金湟)의 두 아들 중 장자인 김운발(金雲發)이 나주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나주를 본으로 삼았다. 제주입도조 김인충(金仁忠)은 시조 김운발(金雲發)의 14세손으로 고려 말에 무신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강화진 좌령랑장(左領郎將)을 역임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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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아버지는 심익연(沈益衍)이고, 작은 아버지는 심정연(沈鼎衍)[?~1755]이다. 1728년(영조 4) 소론 일파가 일으킨 이인좌(李麟佐)[?~1728]의 난에 심래복의 삼촌인 심성연(沈成衍)·심익연(沈益衍) 형제가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1755년(영조 31) 2월 나주의 벽서 사건이 수습되고 5월에 실시한 과거 답안지에 심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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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제주의 근대 불교를 중흥시킨 승려. 1876년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학림암 보하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 불교계의 교단을 이끌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제주불교협회를 창설하였고 근대 제주 불교를 중흥시켰다. 1902년 원흥사의 서무로 활동했고, 1907년에는 불교연구회의 내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 49세에는 대본산 영명사 주지에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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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제주선무사를 지낸 문신. 본관은 길안. 자는 원질(元質). 길안임씨의 시조이다. 1360년(공민왕 9) 과거에 급제하여 개성참군이 되었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병법에 밝아 원수 김득배(金得培)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1363년(공민왕 12) 서장관으로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당시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이 왕위를 탐내어 원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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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를 유람한 문신. 본관은 나주.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 아버지는 제주목사와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임진(林晋)이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20세가 넘어서 성운(成運)에게 사사하였다. 1576년(선조 9)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과거 급제 소식을 제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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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라를 시조로 하는 제주의 세거 성씨. 제주양씨(濟州梁氏)는 탐라 개국 설화에 나오는 삼신인(三神人) 가운데 한사람인 양을라(梁乙那)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중시조(中始祖) 양탕(梁宕)은 시조 탁라왕 양을라(良乙那)의 세손이다. 탐라국광순사(耽羅國廣巡使)로서 신라에 입조하여 광순사를 지냈으며, 383년(신라 내물왕 28)에 탐라 광순사로 안무사인 부계량(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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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양주. 자는 성경(成卿)·태성(台城), 호는 정헌(靜軒)·대릉(大陵). 우의정 조태채(趙泰采)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조겸빈(趙謙彬), 아버지는 이조참판 조영순(趙榮順)이며, 어머니는 김시눌(金時訥)의 딸이다. 부인은 홍지해(洪趾海)의 딸이다. 1775년(영조 51)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별검(別檢)이 되었다. 1777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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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몽골에서 탐라 지역에 설치한 탐라총관부의 장관. 다루가치는 원(元)에서 총독·지사(知事) 등을 지칭한 직명으로 한자로는 달노화적[達魯花赤]으로 표기한다. 어원은 몽골어의 ‘진압하다’ 또는 ‘속박하다’라는 뜻을 지닌 ‘daru'에 명사 어미 ‘gha’와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chi’를 붙여 ‘진압에 종사하는 사람’, ‘속박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그것이 다시 총독·지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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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몽골의 탐라 지배기 때 탐라에 주둔했던 고려군과 몽골군을 아울러 이르는 말. 몽골은 1273년(원종 14) 탐라 삼별초를 정벌한 뒤 상당수 고려군과 몽골군을 탐라에 주둔토록 했으며, 이들 탐라진수군은 10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들은 몽골의 탐라 지배를 가능케 함과 동시에, 탐라가 일본과 남송(南宋) 정벌의 전초 기지로서 경영되었던 데에 따른 것이었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