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4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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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의미역 |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장여동 |
성격 |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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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592년 4월 13일 |
종결연도/일시 | 1598년 11월 19일 |
발생(시작)장소 | 부산성 |
관련인물/단체 | 이순신 |
[정의]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역사적 배경]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좌기관(合坐機關)을 설치하여 대비하기도 하였으나, 선조 때 조정 내부는 대체로 당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이(李珥)가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정에서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이행되지 않았고, 민폐만 야기시킨다는 원성이 높았다.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은 전비(戰備)를 중지하자는 장계(狀啓)를 올리기도 하였다.
[발단]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85년경부터 대륙 침공의 의도를 나타냈고, 1587년에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인 규슈[九州] 정벌을 마치고 대마도주 소요시시게[宗義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제3차 일본 사신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 달 뒤에 입경하여 일본의 ‘가도정명(假道征明 :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데 조선의 길을 빌린다는 구실)’를 통보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이 사실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金晬)·이광(李洸) 등으로 하여금 경상도·전라도 연안에 성들을 수축하게 하였다. 신립(申砬)·이일(李鎰)에게는 변방을 순시하게 하는 등 특히 영남 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경과]
1592년(선조 25) 4월 14일을 기하여 일본군의 대군이 침략을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좌수영·우수영의 수군도 일본군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이미 여수 지방에서 거북선을 건조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순신은 본영과 휘하 각 진의 전선을 동원하여 경상도 남해안으로 진출하였다. 이순신은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하였다. 옥포·합포·당항포·율포·노량·한산도 등에서 왜의 수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때 전라남도 지방 각처의 수령과 만호가 함께 출정하였다.
낙안군수 신호(申浩),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 녹도만호 정운(鄭運), 방답진첨사 이순신(李純信), 사도첨사 김완(金浣),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 등이 이순신과 함께 공을 세웠다. 이순신의 연전연승의 전공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적극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순신의 승리로 인하여 임진왜란 초기 국면에서 전라도가 보전될 수 있었다. 이에 전라도에서는 왜적을 이 땅에서 격퇴하고자 하는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이러한 전라도 의병의 활약에 조선 군대가 전열을 정비하고 또한 명나라 군대가 원조하면서 전세는 조선에 유리하게 전환되었다.
1593년(선조 26) 8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여수에 통제사영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여수가 지리상으로 외딴 곳이므로 왜와 해전을 벌이는 데는 지세가 불리하다는 이유로 본영은 그대로 남겨둔 채 한산도로 본진을 옮겨갔다. 한산도는 선박을 감추어 놓기가 좋으며 또한 왜의 수군이 남해안을 통과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1597년(선조 30) 1월 명나라와의 화의 교섭이 결렬되자 일본의 20만 군대가 다시 조선을 침범하면서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이 해 2월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다. 원균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왜의 수군과 대적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왜군은 섬진강을 따라 구례 운봉을 지나 전라도 내륙까지 침범하였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장흥의 회령, 포진 등 남해안 일대에 흩어져 있던 전선과 병사를 모아 해남의 어란포(於蘭浦)와 진도의 명량(鳴梁)에서 왜군을 대파하였다.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여수 지역에서는 정철[1544~1595]·정린[1556~1595]·정춘[1555~1594]의 활동이 주목된다. 1592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들은 재산을 털어 이순신의 휘하로 정운(鄭運)·송희립(宋希立) 등과 함께 당항포로 진격하는 등 많은 전장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여수 지역에 기반을 둔 창원정씨 사람들로서 후에 가곡사에 배향되었다. 지금은 여수시 웅천동에 위치한 오충사에 배향되어 있다.
이들과 함께 여수 지역에서는 흥국사를 중심으로 한 의승수군(義僧水軍)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직 관료, 무과 출신, 유생, 승려 등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전라도 수군과 결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라좌수영 산하의 의승수군은 상설군으로 편제되어 흥국사에 주둔을 하게 된다. 승대장의 휘하의 인원을 사찰 내의 각 전각과 산내의 암자에 편성시키고 있었는데, 지금의 여수시 한산사와 석천사 등지에도 파견되어 있었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진남관 동편에 있던 승청(僧廳)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승군의 역할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결과]
이순신은 전세가 불리하여 퇴각하던 일본 수군과 최후의 일전을 겨뤘다. 이른바 남해 노량해전이었다. 여기에서 이순신의 수군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그 자신은 전사하였다. 이때가 1598년(선조 31) 11월이었다. 이순신은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若無湖南是無國家)’는 유명한 글귀를 남겼다. 이는 이순신 수군의 승리가 전라좌수영을 기반으로 이룩된 것이고 또한 전라도의 수많은 의병의 활약에 의한 것임을 적시한 것이었다.
7년간의 왜란은 조선, 명, 일본의 3국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경제적 파탄과 사회 질서의 붕괴를 가져왔으며, 전란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재의 손실이 막대하였고 각처에서 도둑이 날뛰었다.
한편 조정은 유비무환을 깨닫고 훈련도감을 만들어 무예를 닦게 했고, 각 지방에도 교관을 두어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도 재래식에서 개량, 발명하여 대비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사상이 확대되는 반면, 왜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의의와 평가]
여수라는 지역의 관점에서 임진왜란을 보았을 때 전라좌수영 본영으로서의 지역적 역할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였던 백성·승려 등을 포함한 지역민의 피와 땀은 조선을 지켜낼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