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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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麗水忠愍祠 |
영어의미역 | Chungminsa Shrine in Yeosu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1829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찬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3년 6월 1일 - 여수 충민사 사적 제381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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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여수 충민사 사적 재지정 |
성격 | 전통건축|사당 |
건립시기/일시 | 조선 중기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1829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조선 중기 사우.
[개설]
여수 충민사는 충무공 이순신,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을 모신 사당이다. 여수 지역 유림과 주민들이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춘기 석채례와 음력 9월 10일에 추기 석채례를 지낸다. 4월 28일에는 충무공 탄신제를 거행하고 있다.
[위치]
여수 충민사는 덕충동 마래산 남쪽 방향의 산기슭에 있다.
[변천]
1598년(선조 31) 충무공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뒤, 영민들이 이순신을 모신 사우를 건립했다고 보아진다. 1601년(선조 34)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항복이 왕명을 받아 통제사 이시언에게 사당 건립을 명하여 원래 자리에 다시 건립하였다. 사당이 건립되자 우부승지 김상용이 간청하여 선조로부터 ‘충민사(忠愍祠)’라는 사액을 받았다.
충민사는 이순신 주향에 전라좌수사 의민공 이억기가 배향되었다. 1677년(숙종3) 보성군수 안홍국이 추가로 배향(配享)되었다. 숙종 35년(1709년) 충민공 이봉상을 신묘로 모시고 석천제를 창설하였다. 1732년(영조 8년) 절도사 이명상이 사우를 중건하고 영의정 박승종의 천기가 있었다.
1871년(고종 8년) 음력 3월 20일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모두 철폐되었다.
1873년(고종 10)에 유림들의 진정으로 복설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9년 다시 철거되었다가 해방 이후인 1947년 주민들이 힘을 합하여 재건하였다. 윤용구(尹用求)가 쓴 현판을 걸었다. 1975년에는 충민사 정화 사업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다.
[형태]
여수 충민사의 건물은 사당, 외삼문, 내삼문, 홍살문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사당 향우측에는 화엄사의 말사인 석천사가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 경내 향좌측에는 충민사 정화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주춧돌은 둥글게 깎아 놓고 민흘림의 원형 기둥을 세우고 이익공(翼工)이다. 기둥머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워넣은 주심포양식이다. 기단은 3단의 장대석으로 이루어졌고 죽담을 놓았다. 사당의 정면 어칸의 창호는 사분합문이며, 양쪽의 창호는 삼분합으로 모두 띠살문이다. 사당의 외삼문은 맞배지붕이고, 내삼문은 맞배지붕 가운데가 양쪽보다 높은 솟을대문이다.
[현황]
외삼문에는 ‘숭모문(崇慕門)’, 내삼문에는 ‘충의문(忠義門)’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충민사 앞 마당 잔디밭을 보면 몇 개의 돌이 놓여 있는데, 그 모양새가 북두칠성을 닮았다. 뒤편에는 바위에서 솟아오르는 샘(石泉)이 있는데 석천(石泉)이라고 한다. 바로 곁에는 석천사가 있다. 임진왜란시 이충무공의 제향을 모시기도 했던 이 사찰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을 선상까지 따라다니며 모신 승려 옥형이 충민사 바로 옆에서 이를 수호하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 경역 밖 입구에는 너비 42㎝, 높이 1.4m, 두께 10㎝ 크기의 작은 비가 하나 서 있는데 '하마비(下馬碑)'라 쓰여져 있다. 그 외 홍살문과 충민사유물관이 있다. 여수 충민사는 1993년 6월 1일 사적 제38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여수시가 관리하고 있으며, 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가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여수 충민사는 충무공 사당으로서 최초의 사액 사당이다. 통영의 충렬사보다 62년, 아산의 현충사보다 103년 전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