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815 |
---|---|
한자 | 有形文化遺産 |
영어의미역 | Tangible Cultural Heritage |
이칭/별칭 | 유형문화,유형유산,유형자산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유종국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역사적·예술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재 가운데 일정한 형태를 지닌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
[개설]
1995년 현행 문화재 보호법에 따르면 문화재는 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로 분류된다. 유형문화재는 건조물·전적(典籍)·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 등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考古資料)를 말한다.
[현황]
남원시에서 국보(국가지정)로 지정된 유형문화재는 산내면 백장리에 있는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이다. 보물(국가지정)은 남원시 왕정동 소재 만복사지 오층석탑을 비롯한 총 25점이고, 사적(국가지정)은 6개소이며, 국가민속문화재(국가지정) 3점, 천연기념물(국가지정) 2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25점, 전라북도 기념물 8점, 전라북도 민속자료 5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29점이 있다.
1. 국보
o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5): 통일신라 말기에 세운 것으로, 탑의 구조와 장식이 일반적인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높이 5m로, 석탑의 받침부가 매우 낮은 반면, 1층 몸체는 폭에 비해 높다. 탑이 올라가면서 너비는 별로 줄지 않았다.
탑의 장식 역시 독특하여, 층마다 탑의 몸체에 보살, 선녀, 천왕 등 다양한 인물상을 화려하고도 자유분방하게 새겨 놓았다. 지붕 아래에는 일반 석탑과 달리 연꽃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일반적인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풍부한 예술성과 독창적 상상력을 한껏 담아 만든 석탑이다.
2. 보물
남원시에는 최근에 지정된 부물 1점을 합하여 25점의 보물이 있다.
o만복사지 5층석탑(보물 제30호,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481): 고려시대 초기에 세운 것으로, 높은 받침부 위에 5층의 몸체와 지붕을 얹었다.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현재 남아 있는 탑의 높이는 5.75m이다. 1968년 탑을 수리하던 중 1층 몸체에서 사리 보관함을 발견하였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은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첫 번째 층이 유달리 높다. 각층 몸체의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지붕마다 귀퉁이 아래를 약간 치켜올렸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단순한 구조이지만, 2층부터 지붕과 몸체 사이에 넓은 돌판을 끼워 넣은 점은 특이하다.
o만복사지 석좌(보물 제31호,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494): 불상을 올려놓았던 받침돌로,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아랫부분은 각 측면에 꽃장식을 담은 코끼리 눈 모양을 새기고 그 위에 연꽃을 조각하였다. 중간부는 아래쪽보다 너비가 줄어들었는데 모서리마다 짧은 기둥을 새겼다.
윗부분은 다시 넓어지며, 그 옆면 역시 연꽃으로 장식하였던 듯하다. 위쪽 바닥 중앙에는 불상을 고정시키기 위해 파놓은 사방 30㎝ 가량의 네모난 구멍이 있다. 높이 1.4m 정도인 하나의 돌에 전체를 조각했는데, 육각형 모양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o만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537-1): 당(幢)은 절에서 행사를 치를 때 문 앞에 내걸던 일종의 깃발로,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그림을 그렸다. 당간지주는 이러한 깃발의 깃대를 받치기 위해 세운 버팀기둥이다. 기둥에는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받쳐 주는 빗장을 끼웠다.
만복사지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커다란 돌을 아무 꾸밈 없이 거칠게 다듬어 육중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풍긴다. 흙에 묻힌 받침부를 고려하면 전체 높이는 5m 정도일 것으로 보인다.
o수철화상 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통일신라 때인 893년(진성여왕 7)에 수철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행적과 뜻을 기려 세운 부도탑이다. 실상사를 처음 세운 홍척(洪陟) 스님의 제자인 수철 스님은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실상사의 지속적인 융성에 크게 공헌했다.
높이 3m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부도탑으로 팔각형을 기본 형태로 삼고 있다. 탑 몸체 각 면에는 사천왕의 모습을 새겼다. 목조탑 형식을 본따 세밀하게 조각해 놓은 지붕에서 석공의 뛰어난 조각술을 엿볼 수 있다.
o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통일신라 때인 893년(진성여왕 7)에 수철화상 능가보월탑과 함께 세운 것이다. 비석의 높이는 2.9m로, 비두에는 구슬을 다루는 용을 조각하였다.
비에는 수철 스님이 태어나 불가에 귀의·득도하여 세상을 교화한 후 열반에 들기까지의 과정과 탑을 세운 경위를 차례로 적어 놓았다. 아쉽게도 현재는 글자가 거의 닳아 없어져 판독이 어렵다.
o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50):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각 부분을 팔각형으로 만들어 그 시대 석등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받침기둥이 둥근 장고(長鼓)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석등과 다르다.
지붕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원형 지붕을 얹은 점 역시 독특하다. 받침과 기둥, 몸체 등 곳곳에 꽃과 꽃잎무늬를 새기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부처의 자비를 담은 불빛을 온 누리에 환하게 비추려는 듯 몸체의 여덟 면 모두에 큼직한 사각창을 내었다
o실상사 부도(보물 제36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각 부분을 팔각형으로 만들어 통일신라시대 부도의 양식을 닮고 있다. 하지만 구성이나 조각을 다소 간략하게 처리한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든 부도이다. 높이는 3.2m이다.
팔각 받침돌 아래쪽에는 용트림과 구름무늬를 조각하였고, 중간부는 무늬 없이 다듬었다. 받침돌 윗부분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몸체의 여덟 면 중 한 면에만 문 모양을 조각하고 나머지 면은 전혀 장식하지 않았다. 급경사를 이룬 지붕 귀퉁이 아래에 꽃 모양을 새겼다.
o실상사 삼층석탑(보물 제37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쌍둥이 석탑으로 통일신라 말기 실상사를 처음 지으면서 함께 세운 것이다. 높이는 5.4m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을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고 각틈 몸체 모퉁이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 귀퉁이 아래는 수평이나, 윗면 모퉁이 부분은 위로 치켜 올려졌다.
받침부가 비교적 커서 균형감은 덜하나 전체적인 모습은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서쪽 탑은 아쉽게도 꼭대기 일부를 잃어 버렸으나, 두 석탑 모두 윗부분이 비교적 원래대로 남아 있어 화려했던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o증각대사 응료탑(보물 제38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통일신라 말기 홍척 스님을 추모하여 세운 부도탑으로, 경내에 함께 있는 수철 스님의 부도탑과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었다.
탑 몸체에 새긴 문짝 무늬는 윗부분이 반원형인데, 자물쇠와 문고리까지 세밀하게 새긴 것이 눈길을 끈다. 지붕은 목조탑의 모습을 본따 정교하게 조각하였으며, 탑의 높이는 2.4m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술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
o증각대사 응료탑비(보물 제39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홍척 스님을 추모하여 세운 부도탑이다. 증각은 홍척 스님이 죽은 후 그의 공덕을 기려 임금이 내린 칭호이며, 일명 남악조사라고도 부른다. 아쉽게도 현재 비의 몸체는 없어지고 비두와 받침돌만 남아 있다.
받침돌은 용머리 모양으로 표현하던 일반적인 추세와는 달리 거북머리를 그대로 조각하였다. 비의 장식이 전체적으로 과장되지 않고 사실적이어서 우리나라 고전 비석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o실상사 백장암 석등(보물 제40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5): 각 부분을 팔각형으로 만든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등으로 비교적 완연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받침부에 연꽃이나 난간을 새긴 기법이 옆에 있는 삼층석탑의 조각기법과 동일하여 서로 같은 시기인 9세기경에 세운 듯하다.
석등의 높이는 2.5m이며, 팔각형 몸체에는 한 면씩 건너 네 면에 네모난 창을 내었다. 몸체와 받침기둥은 거의 장식을 하지 않았고 지붕은 간결하면서도 평평하게 처리하였다. 대웅전 앞에 있는 석등에 비해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o실상사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통일신라 말기에는 지방의 여러 선종 사찰에서 쇠를 녹여 많은 불상을 만들었는데, 이 불상은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높이는 2.69m이다. 무릎 아래는 복원한 것이며, 깨어진 두 손도 근래에 찾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붙였다.
두루뭉술한 머리 윤곽, 촘촘한 고수머리, 원만하고 시원스런 얼굴, 넓은 가슴에 갸름한 허리 등 신라 시대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온유함과 생동감을 보이던 앞 시대의 불상과 달리 근엄하고 딱딱한 표정을 띠고 있어 신라 말기 불상의 변천 양상을 가늠케 한다.
o용담사지 석불입상(보물 제42호, 남원시 주천면 용담리 292): 커다란 바위에 부처의 서 있는 모습과 그 몸 둘레에 서린 빛을 요사한 광배를 함께 조각한 것이다. 높이가 6m에 이르는 대단히 큰 작품으로, 받침돌은 별개의 타원형 자연석을 사용하여 많은 부분이 닳거나 깨어져 흔적만 남아 있다.
뚜렷한 머리 윤곽, 긴 얼굴과 귀, 간략한 목주름, 거칠게 조각한 옷 무늬 등이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데, 얼굴에 비해 체구가 크며, 당당한 어깨, 넓은 가슴, 두터운 하체를 가져 강인하고도 묵직한 인상을 준다.
o만복사지 석불입상(보물 제43호,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482): 고려 초기 만복사를 건립하면서 함께 만든 것으로, 바위에 부처의 서 있는 모습을 조각한 작품이다. 부처 바깥쪽에는 몸에서 발하는 빛을 묘사한 광배를 조각했는데 위쪽 일부가 없어졌다. 받침으로는 팔각형의 납작한 돌을 놓고 그 위에 연꽃으로 장식한 둥근 돌을 얹었다.
머리의 윤곽은 뚜렷하고 고수머리는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얼굴은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에 미소를 머금어 마치 살아 있는 듯하다. 어깨로부터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자락과 원만한 굴곡을 이루는 몸매가 어우러져 자연스럽고도 우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광배 뒷면에는 부처의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해 놓았다.
o광한루(보물 제281호,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 78[요천로 1447]): 조선 전기인 세종 때 황희가 처음 세운 것을 1626년(인조 4)에 다시 지었다. 원래 이름은 광통루(廣通樓)였으나, 정인지가 그 수려한 경치에 감탄하면서 전설상의 달나라 궁궐인 ‘광한청허부’와 닮았다고 하여 광한루라 고쳐 불렀다. 건물 북쪽 중앙에 층계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점점 기우는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고종 때 만든 것이다.
건물 앞에 연못을 만들고 그 위를 가로질러 오작교라는 반월형 교각의 다리를 놓았다. 연못을 노니는 오색 잉어는 건물을 에워싼 아람드리 나무와 더불어 찾는 이들에게 풍성한 볼거리와 기쁨을 더해 준다.
o백장암 청동 은입사 향로(보물 제420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청동으로 만든 향로로서, 표면에 다양한 무늬와 글을 새기고 그 홈을 은으로 메워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만력십이년갑신삼월(萬曆十二年甲申三月) 주성(鑄成)”이라는 글귀가 있어 1584년(선조 17)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향로의 주둥이는 바깥쪽으로 벌어져 넓고 둥근 테를 이루고 있다. 몸체와 발을 따로따로 만들어 붙였는데, 받침은 아래쪽을 향해 나팔처럼 퍼져 있다. 꽃무늬와 테두리선, 글자 등으로 곳곳을 다채롭게 장식하여 섬세하면서도 활기찬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o약수암 목조탱화(보물 제421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산 15): 가운데에 자리한 아미타불과 그를 둘러싼 열 분의 보살 및 제자를 나무판에 조각한 작품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목조탱화가 유행하였다. 1782년(정조 6)에 만든 것으로 법당에 모신 불상의 뒤쪽 벽면에 붙어 있었다.
높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있는 아미타불은 세 겹의 둥근 연꽃무늬 테두리를 두르고 있고, 그 양옆에는 네 보살을 배치하였다. 위쪽에는 가운데에 부처의 두 제자를, 그 양옆으로 다시 네 보살을 배치하였다. 탱화 가장자리와 불상 사이사이에 섬세한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각진 얼굴과 신체, 두텁게 표현된 옷 등에서 조선 후기 불상 양식을 엿볼 수 있다.
o선원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422호,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392):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높이는 1.2m, 무릎폭은 90㎝이다. 타원형의 얼굴에 날카로운 눈과 예리한 코, 꽉 다문 입술 등에서 고려시대 철불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신체는 부드러운 어깨선, 듬직한 가슴, 좁은 허리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책상다리를 한 하체 등 비교적 사실적이다.
옷은 법의를 표현하였는데, 마치 한복을 입은 것처럼 옷가슴을 브이(V)자로 여민 것이 특이하다. 얼굴은 다소 과장되어 온화함과 우아함을 잃어버린 반면에 신체는 자연스러운 안정을 이루고 있다. 손은 근래에 새로 만들어 끼운 것이다.
o신계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423호, 전라북도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 산 18): 자연 암석의 한 면을 다듬어 거기에 부처의 앉은 모습을 돋을새김한 마애불이다. 도선 스님이 하룻밤만에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몸 둘레에 서린 빛을 줄에 꿴 구슬로 둥글게 감싸서 표현한 것은 희귀한 예이다. 왼쪽 어깨에 걸친 옷은 단순한 선으로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이목구비를 비교적 생동감 있게 조각하였다. 넓은 어깨, 불룩한 가슴, 통통한 팔다리에도 입체감이 실려 있어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뚜렷한 입체감과 생동감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이다.
o이상길 초상(보물 제792호, 국립전주박물관 보관): 조선 중기의 충신 이상길의 초상화이다. 이상길은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병자호란(1636년)을 맞아 청군이 강화도를 침범하자 비탄에 잠겨 자결하였다. 이 그림은 공복(公服) 차림에 두 손을 맞잡고 앉은 모습을 비스듬한 위치에서 그린 것이다.
양 어깨의 경사를 달리하여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점은 조선 중기 초상화의 전형적인 특색이다. 반면 일정한 형식에 따라 얼굴 곳곳에 물감이 번지도록 하여 입체감을 준 기법은 좀더 후기에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조선 중기에 그린 원본을 훗날 충실하게 베낀 사본으로 보인다.
o무민공 황진 가전 고문서(보물 제942호,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양촌): 조선 중기의 충신 황진의 집안에서 대를 이어 간직해 온 고문서들이다. 황진은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자 안덕원과 수원, 상주 등지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뒤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황진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과 손자들도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받았다.
나라에서는 그들에게 벼슬을 내리면서 임명장으로 교지를 발급하였다. 이 문서는 그러한 교지와 더불어 상속 문서인 분재기(分財記), 청원서인 소지(所志), 관공문서인 입안문(立案文)·완문(完文)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 다수가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조선 중기의 정치·경제·사회 및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현재 대산면과 대강면에 거주하는 황진의 후손들이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
o개령암지 마애불상군(보물 제1123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215): 절벽을 이루는 바위에 여러 부처의 모습을 돋을새김한 불상들로, 모두 열두 구에 달한다. 가장 큰 불상은 높이가 4m로 조각솜씨도 뛰어나 으뜸으로 모셔진 것이라 여겨진다. 타원형의 얼굴, 다소 과장된 큼직한 코, 간략하게 처리한 옷주름, 듬직한 체구 등에서 고려시대 유행하던 불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 불상 아래에 ‘명월지불(明月智佛)’이란 글귀가 새겨진 것으로 미루어 진리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을 뜻하는 듯하다. 1~2m 크기의 작은 불상들 역시 비슷한 양식으로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o기묘제현수필(보물 제1197호,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739[영사정길 28-13]): 조선 초기 안처순(安處順)이 지방관리가 되어 떠날 때 친한 벗들이 이별의 정을 담아 써준 시문을 모은 책이다. 이들은 중종 때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되어 죽거나 화를 당하여 기묘제현이라 불린다.
안처순의 손자인 안응국(安應國)이 이 시문들을 묶어 ‘기묘제현수필’이라 표제를 붙였다. 선조 때 한준겸(韓浚謙)과 이호민(李好閔)이 주선하여 병풍 형식의 책으로 만들었으며, 표제의 글씨는 명필 한석봉(韓石峯)이 썼다.
o기묘제현수첩(보물 제1198호,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739[영사정길 28-13]): 조선 초기 안처순(安處順)이 지방관리로 재직할 때 친한 벗들이 보내 온 편지를 모은 것이다. 모두 열세 명의 기묘제현이 쓴 것으로 도합 39통의 편지를 담고 있다.
안처순의 손자 안응국이 묶어서 ‘기묘제현수첩’이란 제목을 붙였다. 병풍 형식의 책자에 한준겸이 서문을 쓰고, 제목 글씨는 한석봉이 썼으며, 후에 조성교(趙性敎)가 간략한 글을 덧붙였다.
o선국사 건칠아미타불 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517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419[산성길 239]):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유행한 건칠기법으로 조성된 상으로, 체구가 장대하고 각 부의 비례가 균형감 있게 느껴진다. 상호(相好)는 원만하고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정상계주와 중앙계주가 있다.
어깨가 둥글고 가슴 부분이 융기되어 있으며 측면 역시 두터워 풍부한 양감이 느껴지는 고려 후기 14세기 전반 불상들과 공통된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료가 건칠이라는 점은 이 상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선국사 건칠아미타불좌상에서는 1,158장의 인본다라니가 나왔다. 이 복장물은 14세기 말에서 15세기 말의 자료들로, 범자를 원상(圓相)으로 배치한 관념화된 도상이란 점에서 불교사상과 관련하여 인쇄사 및 서지학 분야에서 중요한 자료여서 불상과 함께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3. 사적
o황산대첩비지(사적 제104호,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2[가산화수길 84]): 고려 말기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金貴榮)의 글과 송인(宋寅)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다.
o만인의총(사적 제272호,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628): 정유재란 때 왜적을 맞아 남원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민·관·군을 합장한 무덤이다. 난이 끝난 뒤에 순절한 이들을 한 곳에 묻고 그들을 추모하는 사당을 지었다. 광해군이 이 사당을 충렬사(忠烈祠)라고 이름지었다.
o남원성(사적 제298호, 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 364-1): 통일신라시대 남원에는 지방행정 중심인 소경이 자리하였으며 그에 따른 성곽이 있었다. 이 성곽을 조선 초기에 중국식 읍성을 본떠 네모 모양으로 고쳐 쌓았다. 약 2.5㎞ 둘레에 높이 4m 정도였으며, 사방에 문을 두었고, 성 안에는 71개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정유재란(1597년) 때 이곳에서 민·관·군이 합세하여 5만 6천여 왜군의 포위 공격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성은 함락되고 거의 1만 명에 달하는 성 안의 주민과 관군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전투 중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민가 몇 채만 남았다 하니 당시의 참화를 짐작할 수 있다. 동학혁명과 전라선 철도 개설 등으로 많이 허물어졌는데, 최근에 일부를 복원하였다.
o광한루원(사적 제303호,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 78[요천로 1447]): 견우와 직녀가 칠월칠석날 하수오작교를 건너 만나는 사연을 담은 정원이다. 전라도관찰사로 있던 정철이 요천(蓼川)의 맑은 물을 끌어들여 은하수를 뜻하는 연못을 파고 반월형 교각 네 개를 이어 오작교를 세웠다.
연못 안에는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으로 일컫는 세 개의 섬을 만들었다. 봉래(蓬萊)·방장(方丈) 두 섬에는 각각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고, 영주(瀛洲)섬에는 작은 정자를 세웠다. 「춘향전」이 이곳을 배경으로 삼은 이래 정원 안에 춘향과 관련된 여러 유적이 들어섰다.
o실상사(사적 제309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지리산 천왕봉을 마주하고 자리한 사찰로, 통일신라 때인 828년(흥덕왕 3)에 홍척 스님이 처음 세웠다. 신라 말기 불법보다 참선을 중시한 선종의 여러 종파가 전국 명산에 절을 세웠는데, 실상사도 그중의 하나이다.
정유재란(1597년) 때 모두 불타 숙종[1674~1720] 때 건물 36동을 다시 지었으나, 고종 때 화재를 당해 현재의 규모로 복구하였다. 경내에는 국보인 백장암 삼층석탑을 비롯해 보물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어, 이 절의 역사적 의의와 품격을 대변해 준다.
o만복사지(사적 제349호,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481): 고려 문종[재위 1046~1083년] 때 처음 세운 만복사가 자리했던 터이다. 처음 지었을 때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근래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쪽·서쪽·북쪽에 각각 법당을 배치한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식 배치였다. 김시습의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린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의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까지 번창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
4. 국가민속문화재
o남원 실상사 석장승(국가민속문화재 제15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33):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조각품으로 원래는 냇가에 모두 네 개가 있었다. 절로 가는 도중 내를 건너기 전에 두 개의 장승이 서 있었는데, 그중 오른쪽 것이 1936년 홍수에 쓸려 내려가 현재는 세 개만 남았다.
장승들은 대략 높이 2.5~2.9m, 너비 40~50㎝ 가량이며,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커다란 귀를 갖는 등 비슷한 양식을 보인다. 장승에 새긴 기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인 1725년(영조 1)에 세운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배치해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곳 장승은 모두 남자 형태이다. 귀신을 쫓는 장승들의 표정이 험상궂기는커녕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o서천리 당산(국가민속문화재 제20호,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348-1): 마을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서천리 당산에는 한 쌍의 돌장승이 있는데, 외형상 구분은 불분명하지만 남쪽의 것은 남자, 북쪽의 것은 여자라고 한다. 악한 기운을 막는다는 뜻으로 남녀 장승에는 각각 ‘방어대장군’과 ‘진서대장군’이라 새겼다.
두 장승 모두 벙거지를 쓰고 수염이 달렸으나 여자 장승에는 귀가 없다. 수수한 노인 모습을 한 여자 장승은 키는 작지만 실제 인간의 모습에 가까우며, 얼굴 표정이 사실적이다. 여자 장승은 마을을 수호한다는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서민의 소박한 표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민속 예술 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갖는다.
o남원 몽심재(국가민속문화재 제149호,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796-3[내호곡2길 19]): 조선 말기 박동식이 처음 세웠는데, 현재는 7대손인 박인기가 살고 있다. 산을 등지고 있는 집 앞으로 낮은 구릉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러 채의 건물이 산자락의 급한 경사면을 따라 앞뒤로 자리하고 있어 높이를 달리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보이며, 그 뒤편의 바깥채와 중간 문을 각기 높이 쌓은 축대 위에 세웠다. 안채에도 아래의 공간을 외양간으로 사용할 만큼 높은 받침부를 두었다. 건물들이 높이 솟아 있음에도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멋과 그윽한 정취를 자아내어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준다.
5. 천연기념물
o진기리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281호,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 495): 수령이 6백여 년 정도 된 느티나무로, 높이는 대략 20m, 가슴높이 둘레 7.8m이며, 가지는 동서로 24m, 남북으로 26m 가량 펴져 있다. 조선 세조 때 우공(禹貢)이라는 무관이 어릴 적 아름드리 나무를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나무를 잘 보호하라는 말을 남기고 마을을 떠난 후 나라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후손들은 그의 말대로 나무를 보호하고 따로이 사당을 지어 한식날에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o지리산 천년송(천연기념물 제424호,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와운리 산 111): 할머니소나무라고도 부르는데, 약 20m 정도 떨어진 곳에 할아버지소나무가 있다. 할머니소나무는 높이가 대략 20m에 이르며, 가슴높이 둘레는 6m, 사방으로 뻗은 가지의 폭은 12m 가량에 달한다. 앞쪽에는 구름도 누워서 지나간다는 와운마을이 있다. 와운마을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수호신으로 믿고서 매년 정월 초사흘에 나무에 제사를 지낸다.
6. 고분군과 성곽, 도요지
남원시에는 그밖에도 남원향교 대성전 등 25점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전라북도 기념물로 남원 교룡산성을 비롯한 8점이 지정되어 있다. 또한 선국사 대북을 비롯한 5점이 전라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보존되어 있고, 선원사 대웅전을 비롯한 29점이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남원시 일원에는 선사 시대와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산재해 있다. 선사 시대 유적지로 초분리 고분군을 비롯한 50여 곳의 고분군과 남원성, 교룡산성 등 성곽지를 비롯한 17개의 성지(성곽지), 요골 도요지를 비롯한 10여 개의 도요지가 있어 남원시가 오랜 역사 속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한 곳임을 짐작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남원 광한루에 있는 비석군과 수많은 노거수, 오래된 전통 가옥들은 면면히 이어온 뿌리 깊은 역사와 선비 문화의 전통을 느낄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