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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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應魯 |
영어음역 | Ha Eungro |
이칭/별칭 | 학부(學夫),니곡(尼谷),하성로(河性魯)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석기 |
출생 시기/일시 | 1848년 1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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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몰년 시기/일시 | 1916년 |
묘소|단소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도통산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진양 |
[정의]
개항기 하동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학부(學夫), 호는 니곡(尼谷), 초명은 하성로(河性魯). 하홍도(河弘度)의 동생인 하홍달(河弘達)의 8세손이다. 고조할아버지 하달성(河達聖)은 호가 국헌(菊軒)인데, 성품이 강개하고 절개가 있어 종천서원의 치욕을 설욕했다. 증조할아버지는 하석봉(河錫鳳)이고, 할아버지는 하재원(河在源)이다. 아버지는 하상호(河相灝)이며, 어머니는 이천묵(李天默)의 딸인 재령 이씨(載寧李氏)이다.
부인은 유춘영(柳春永)의 딸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그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다. 큰아들은 하재도(河載圖)로 하우선(河禹善)과 하겸선(河謙善) 2남을 두었고, 2녀는 박낙종(朴洛鍾)·조용완(趙鏞完)에게 시집갔다. 둘째 아들은 하재청(河載淸)으로 아들이 없어 동생 하재현(河載玄)의 아들 하원선(河元善)을 양자로 들였다. 셋째 아들은 하재형(河載泂)으로 계부(季父)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넷째 아들은 하재현(河載玄)으로 아들 하구선(河九善)·하원선(河元善)을 두었다. 큰딸은 벽진 이씨 이운화(李雲華)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전주 이씨 이정하(李貞夏)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1. 학문 연마
하응로(河應魯)는 1848년(헌종 14) 1월 16일 진주목 서쪽 북평리(北坪里)에서 태어났다. 20세 때 동향의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1809~1877]에게 육경과 사서를 배웠다. 또 서울 냉천동에 살고 있던 성호 학맥을 이은 성재(性齋) 허전(許傳)을 찾아가 예악을 배웠다.
기억력이 뛰어나 한번 본 글은 아무리 어려워도 모두 암송하였으며, 아무리 세세한 것일지라도 한번 눈으로 본 것은 모두 기억했다. 처음에는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얼마 뒤 후회하면서 “우리 가문은 겸재(謙齋)[하홍도]·설창(雪牕)[하철] 선생 이후로 법도가 있으니, 어찌 공부를 하면서 위기지학을 버리고 다른 것을 추향하겠는가.”라고 하고서, 오로지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의 가르침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실천을 급무로 여기며,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학문을 하면서 천인(天人)·성명(性命)을 말하는 사람들과는 어울려 논쟁하지 않았다. 중년 이후로는 심방리(尋芳里)[일명 니방]에 집을 짓고 ‘니곡정사(尼谷精舍)’라 하고서, 손자들과 고을의 수재들을 가르쳤다.
2. 남명학의 계승과 『겸재집』 중간
하응로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간추려 볼 수 있다. 하나는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겸재 하홍도가 주창한 심성 수양과 실천을 중시하는 학풍을 계승하려고 노력한 점이다. 그는 ‘남명 이후 제일인자’로 일컬어진 하홍도의 동생 하홍달의 7세손으로서, 심성을 수양하여 도덕적 주체를 세우고 현실생활 속에서 실천을 중시하는 학풍을 계승하고 지키려고 평생 노력하였다. 둘째는 종천서원에서 인근의 학자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월산(月山) 조성주(趙性宙), 월주(月洲) 하조헌(河祖憲) 등과 함께 강학을 하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여 고을의 풍습을 순화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점이다.
셋째는 『겸재집(謙齋集)』을 중간하고, 『남명집(南冥集)』을 교정하여 간행하는 일을 주도한 점이다. 하홍도를 제향하는 종천서원이 1676년(숙종 2) 옥종에 창건되었다. 그런데 1759년(영조 35) 진주목사로 부임한 노론계의 조덕상(趙德常)이, 하홍도가 서인계의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비방하고 남인계의 윤선도(尹善道)와 허목(許穆)을 존경하였다는 이유로 죄목을 삼아 하홍도의 위패를 종천서원에서 출향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이 지역에서는 ‘종천서원 원변(院變)’이라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난 뒤 하응로는 고조할아버지 하달성과 이를 바로잡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여 하홍도의 위패를 다시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겸재집』의 중간을 위해 노력하여 모한재의 유계(儒契)를 복원하고, 거금을 모아 1912년 모한재에서 목판본으로 『겸재집』을 중간하였다. 또 청곡사·두방사·뇌룡정 등에서 『남명집』 간행을 의논할 적에 논의를 주도하였다.
3. 효행
효성이 지극하여 1898년(고종 35) 부모의 상을 당하자 지극한 효성으로 3년상을 치렀다. 5리 밖에 묘소가 있었는데, 날마다 성묘를 하여 하루도 폐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1916년 12월 15일 별세하니 향년 69세였다. 당시 문상하던 사람들이 “후생이 의지할 바가 없어졌다.”고 하는 사람, “어진 이가 돌아가셨다.”고 하는 사람, “문중에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 “고을에 선비가 없게 되었다.”라고 하는 등 추모하였다.
[학문과 저술]
하응로의 학문과 사상은 하홍도와 조식의 심성을 수양하고 실생활에서 실천을 중시하는 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실천을 하지 않으면서 구이지학(口耳之學)을 일삼는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리설에 대해서도 식견이 있어 곽종석(郭鍾錫)·김진호(金鎭祜) 등 당대 저명한 학자들과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은 궁리와 거경을 모두 중시하는 면모를 보인다. 그는 “격물치지(格物致知)는 말미암아 이치로 나아가는 것이고, 극기복례(克己復禮)는 말미암아 일을 실천하는 바이다.”라고 하여, 심성 수양과 실천을 중시한다고 해서 이론적인 탐구를 도외시하지 않았다.
저술로 4권 2책의 『니곡집(尼谷集)』이 있다. 권1과 권2는 시로, 「모한재팔영(慕寒齋八詠)」·「등천왕봉(登天王峯)」·「금산기행(錦山紀行)」·「호남기행(湖南紀行)」 등 기행시와 만장이 많다. 권3은 스승 허전(許傳) 및 교유인 허유·김진호·곽종석·하용제(河龍濟)·조성주(趙性宙) 등과 주고받은 편지가 대부분이다. 권4는 부록 문자로 되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도통산(道通山) 건좌(乾坐)의 언덕에 있다.
[상훈과 추모]
하봉수(河鳳壽)가 행장을 지었고, 노상직(盧相稷)이 묘갈명을 짓고 썼으며, 조병규(趙昺奎)가 묘지명을 짓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