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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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弘達 |
영어음역 | Ha Hongdal |
이칭/별칭 | 치원(致遠),낙와(樂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석기 |
출생 시기/일시 | 16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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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38년 |
몰년 시기/일시 | 1651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
묘소|단소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종화리 정개산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진양 |
[정의]
조선 후기 하동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치원(致遠), 호는 낙와(樂窩)이다. 진양 하씨의 시조는 고려 시대 사직(司直)을 지낸 하진(河珍)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9세를 내려와 하즙(河楫)이 현달하여 진주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시호는 원정(元正)이다. 11대조는 하윤원(河允源)으로 역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10대조는 하자종(河自宗)으로 호는 목옹(木翁)이며, 병부상서를 지냈다. 하자종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 현달했다. 셋째 아들이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다. 다섯째 아들이 하결(河潔)로 대사간을 지냈는데, 하홍달(河弘達)의 9대조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승훈랑을 지낸 하보용(河保溶)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하철부(河哲夫)이고, 할아버지는 봉직랑을 지낸 하무제(河無際)이다. 아버지는 하광국(河光國)으로, 자는 군빈(君賓)이다. 어머니는 이광우(李光友)의 딸인 합천 이씨이다.
[활동 사항]
하홍달은 1603년(선조 36) 경상도 진주 안계[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백형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593~1666]에게 배웠는데, 10세가 되자 능히 글을 지었다. 성장하자 신체가 크고 용력이 있어 익히지 않고서도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했다. 그리하여 글공부를 그만두고 무예를 익히려 하였으나 백형이 말리며 학문하기를 권했다. 어느 날 무예를 좋아하던 구습을 버리고 경서를 읽으며 마음을 수렴하는 공부를 더하였다. 광해군 말의 혼란한 정치 때문에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거처하는 집의 당호를 ‘낙와(樂窩)’라 하였다.
하홍달의 활동 사항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으며, 행실이 모범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행의(行誼)와 유행(儒行)으로 천거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6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상례를 치르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어머니를 모실 적에는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잠자리를 돌보고 미음을 끓여 드리는 것을 모두 손수 했다. 마음과 이목을 기쁘게 해 주려고 애를 썼다. 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재계하고 약을 달여 올렸으며,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다. 1638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사흘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 거의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장례와 제사는 한결같이 예제를 따랐다.
둘째는 하홍도와 함께 강학을 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모친상을 마친 뒤 백형과 함께 살며 재산을 공유하며, 백형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의 모든 일을 맡아서 하였다. 사림산 밑에 재실을 짓고 ‘모한재(慕寒齋)’란 현판을 달고서 백형과 함께 학문을 하고 수양을 하는 장소로 삼았다. 그곳에서 의리를 강설하며 후진을 양성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하홍도와 함께 ‘하남백숙(河南伯叔)’이라고 칭했다. 옛날 송나라 때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에 견주어 말한 것이다.
그는 명이 짧아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상도관찰사가 ‘행의(行誼)’로써 조정에 아뢰고 이경석(李景奭)·조경(趙絅)이 ‘유행(儒行)’으로 천거해, 조정에서 바야흐로 관직을 내리려 할 때 안타깝게도 죽은 것이다. 사람들이 한번 보고 호걸스런 선비라고 했으며, 하홍도가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내 동생과 학문을 하면서 서로 도움을 준 것이 많다. 무거운 임무를 맡을 만한 국량은 내가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학문과 저술]
하홍달의 문집으로 후세에 만든 『낙와유고(樂窩遺稿)』가 있으나, 다른 사람의 문집에서 발췌한 만장 3수뿐이다. 하나는 학포(學圃) 정훤(鄭暄)에 대한 만장이고, 하나는 죽당(竹塘) 최탁(崔濯)에 대한 만장이며, 하나는 성횡(成鐄)에 대한 만장이다. 따라서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살던 시대 옥종 일대의 학풍과 분위기, 그리고 하홍도의 학문과 사상 등을 통해 그 대략을 유추해 볼 따름이다.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그의 묘갈명병서에 의하면, 하홍달은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한 뒤로, 주공과 공자의 글로부터 송나라의 정자·주자의 서책을 두루 강설했다고 하였다. 문장이 간결하고 밝았으며, 글씨가 굳세고 강건하였고, 무예·수학·의약·병법 등에도 두루 통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남명학파의 일원으로서 조식(曺植)의 학문 성향을 계승하여 경학과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실생활에 필요한 학문을 두루 궁구하는 박학성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관혼상제의 예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고, 행실이 매우 엄정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하홍달은 주자학에 바탕을 둔 학문을 한 것으로 추정되며, 남명의 정신을 계승하여 실천적인 면을 중시하는 학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인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종화리 정개산(鼎盖山) 남쪽 해좌 언덕에 있다.
[상훈과 추모]
최석정이 묘갈명병서를 지었는데, 자질이 엄격하고 굳세며 국량이 관대하며, 기상은 한 세상을 덮을 만했으며, 학문의 힘으로 절제했고, 용력은 삼군의 장수를 빼앗을 만했는데 근신한 태도로 조절했다고 쓰여 있다. 영조 때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