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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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剛 |
영어공식명칭 | Kim Ga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1월 4일 - 김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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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0일 - 김강 광주 3.1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30년 8월 6일 - 김강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김강 대통령 표창 수여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강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전라좌도 광주목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7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양림교회 성도 |
[정의]
일제강점기 광주 3.1운동을 이끈 독립유공자.
[개설]
김강(金剛)[1890~1930]은 1890년(고종 27) 전라좌도 광주목[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0일 전라남도 광주의 작은장날을 이용하여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朴愛順),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崔丙浚)·최한영(崔漢泳)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거행하다 체포되어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5일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에 참관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서울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였던 김철(金鐵)과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崔正斗)가 귀향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정황을 소상하게 전하였다. 한편,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 도쿄[東京] 유학생인 정광호(鄭光好)가 귀국하여 도쿄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 거사 내용을 알리자, 최한영·김복수(金福洙) 등이 2.8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김강은 1919년 3월 5일 밤 양림동에 있는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숭실학교 교사인 최병준과 최한영, 황상호(黃尙鎬), 강석봉(姜錫奉), 한길상(韓吉祥), 송흥진(宋興眞), 김용규(金容奎), 손인식(孫仁植), 김태열(金泰烈), 최정두, 김복현(金福鉉), 서정희(徐廷禧) 등과 회의를 열고, 전라남도 광주 큰장날인 3월 8일을 이용하여 광주 3.1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서울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문, 독립가, 격문 등을 가지고 광주 3.1운동 계획을 세우고 행사에 필요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광주 3.1운동 계획을 추진하기에는 준비 기간이 짧아서 다시 작은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광주 장(場)은 부동교(不動橋) 부근 넓은 백사장에서 작은장이 열렸고, 석서정(石犀亭) 맞은편 천변에서 큰장이 열렸다. 광주의 큰장과 작은장은 호남 지방의 대표적인 장으로, 장날이면 호남 각지에서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 아래의 작은장터에는 박경주(朴京柱), 박일구(朴一求), 홍승애(洪承愛) 등과 기독교인,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 군중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때 김강은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큰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만세를 외쳤고, 시위 군중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장을 출발하여 시내로 행진하여 경찰서 앞으로 돌진하였다. 일제는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총칼로 진압하고 무차별 검속을 펼쳤다. 김강은 이때 체포되어 1919년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으로 3년형을 언도받았으며, 이에 불복하여 공소(控所)를 제기하였다. 1919년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김강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