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393 |
---|---|
한자 | 崇一學敎 |
영어공식명칭 | Soongil School |
이칭/별칭 | 광주숭일학교,광주남학교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66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김지형 |
인가 시기/일시 | 1907년 3월 5일 - 광주남학교 설립 인가 |
---|---|
개교 시기/일시 | 1908년 2월 1일 - 광주남학교 개교[4년제] |
개교 시기/일시 | 1945년 11월 21일 - 숭일중학교로 재개교 |
폐교 시기/일시 | 1937년 8월 10일 - 숭일학교 폐교 |
이전 시기/일시 | 1910년 12월 - 광주남학교 이전 |
개칭 시기/일시 | 1910년 12월 - 광주남학교에서 숭일학교로 개칭 |
최초 설립지 | 광주남학교 -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
주소 변경 이력 | 숭일학교 -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66 |
성격 | 사립고등학교 |
설립자 | 유진 벨(Eugene Bell)[한국명 배유지] |
전화 | 062-608-0500[교무실]|062-608-0504[행정실] |
홈페이지 | http://soongil.gen.hs.kr |
[정의]
근대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변천]
숭일학교(崇一學敎)는 수피아여학교와 함께 광주 최초의 중등학교로 꼽힌다. 1907년 유진 벨(Eugene Bell)[한국명 배유지]과 오웬(Clement C. Owen) 목사는 개신교 신자의 자녀[남 1명, 여 3명]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시작하였다. 학교는 유진 벨 목사 사택 내 사랑방으로, 지금의 광주시립사직도서관 일대이다. 초창기에는 외국인 선교사를 꺼리는 탓에 학생들이 없었다. 1908년에는 대한제국의 인가를 얻어 30명의 남학생과 함께 양림동에 숭일학교를 개교하였다. 1910년에는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66번지 자리에 광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을 지어 교사(校舍)로 사용하게 되었고, 교명 또한 유일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의 '숭일(崇一)'로 교체하였다.
1912년에 숭일학교는 보통과 6년제, 고등과 4년제 병설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인 1913년에는 고등과 졸업생이 진학하는 전문학교 과정의 특별과를 설치하였다. 1917년 「광주지방사정」에 따르면, "9학급 91명 재학, 교원 13명 재직, 졸업생 51명을 배출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25년에는 고등과 폐지 후 2년제 실업과[목공부]로 개편되었다가, 1927년 송정리공업학교로 통합되어 보통과만 남게 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숭일학교 재학생과 교사들이 대거 참여한 일로 인하여, 중학교 과정은 완전 폐지되었다. 1937년에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원인이 되어 보통과도 폐교되었다. 이후 숭일학교는 광복 후인 1945년 6년제 숭일중학교로 재개교하였다.
[숭일학교와 독립운동]
1919년 3.1운동이 서울에서 발생하였고 광주에서는 3월 8일 시위를 시도하였으나 미뤄지고, 3월 10일에 시위가 발생하였다. 3월 5일 김철 등 17명의 인사가 양림동에 있는 당시 숭일학교 교사 남궁혁의 집에 모여 3월 8일을 거사일로 계획하였다. 이 중 숭일학교 학생의 동원은 교사 손인식, 최병준, 농감 송흥진의 담당이었다. 이튿날인 1919년 3월 6일 다시 남궁혁의 집에 모인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 외 12명은 학생들과 기독교인의 거사를 결의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10일에는 최병준이 숭일학교 학생 정두범·김철주·김성민·김판철·김정수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20매씩 배포하여 만세 시위행진 때 장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눠 주었으며 시위를 선봉에서 주도하였다. 숭일학교는 1919년 3월 10일 시위에만 그치지 않고 11일 오후 5시 광주농업학교 학생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숭일학교 관계자는 총 28명이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으며, 이 중 학생 송광춘은 대구에서 옥사하였다. 1937년 숭일학교는 신사참배 거부가 원인이 되어 강제로 폐교되었다.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폐교를 시작으로, 광주에서는 숭일학교가 가장 먼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폐교되었다.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