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2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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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俗 |
영어의미역 | Folk Customs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집필자 | 김희찬 |
[정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습속(習俗).
[개설]
민속은 민중들의 삶속에 일상적·집단적·유형적으로 되풀이되어 누적된 지식·기술·행위 등의 총체적인 문화 현상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따라서 민속은 공간적·역사적·시간적 조건에 의해 형상화된 민간의 생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배경]
충주 지역 민속의 배경은 다양한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역사적으로 보면, 삼국시대의 경우 영토 경계의 각축장으로 백제·고구려·신라의 통치권에 있었고, 통일신라·고려·조선을 지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영토 경계의 각축장으로 부각되었던 삼국시대의 경우 남한강과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는 쟁탈의 과정에서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하고 있어 삼국의 다양한 문화적 기층 요소가 내재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이후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일정 부분 남아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 구체적인 인과 관계를 살피기에는 민속의 속성상 쉽지 않다.
또한 인문·지리적으로 충주는 남한강 유역의 최대 거점 도시이며, 동시에 영남과의 소통에 있어 소백산맥 이북의 최대 도시로 기능하면서 다양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져 왔다. 특히 조선시대 이후 활발하게 이용된 수운(水運)을 통한 서울과 영남의 수상 교통로로서의 역할은 물론 영남대로(嶺南大路)의 길목으로서의 역할 또한 충주 지역의 문화적 성장에 있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교류 과정에서 정착된 민속 현상 역시 충주의 민속 문화 형성의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근현대를 지나며 충주는 많은 변화 과정을 거쳤다.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과거의 전통과 민속 현상에 대한 조사 기회를 잃은 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변형 왜곡되었고, 또한 해방 이후 산업화 과정을 통해 민속의 해체 과정 역시 가속화되어 미세한 부분에 대한 접근 또한 쉽지 않다. 그러나 민속의 속성상 집단의 전승력을 바탕으로 유형화되어 이어지는 현상들을 중심으로 충주 지역 민속에 대한 개괄적인 접근은 가능하다.
[동제]
집단의 전승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동제(洞祭)를 중심으로 충주 지역 민속 현상의 단면에 접근할 수 있다. 충주 지역의 동제는 주로 면 단위 지역에서 계승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01년 조사에 의하면 면 지역 68개 마을에서 동제가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조사 당시 시내 동 지역의 경우 전승이 확인된 예가 없어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민속의 파괴 정도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면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동제의 경우 각 지역별 형태에 따라 몇 가지 유형화가 가능하였다.
마을의 위치에 따라 산골의 경우에는 산신제를 중심으로 일부 서낭제가 가미된 형태로 전승되고 있으며, 주요 길목의 경우에는 마을 안팎의 경계를 중심으로 서낭제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남한강 주변 마을에서는 강을 대상으로 하는 용왕제나 당고사 형태도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로 정월 보름 안쪽에 동제를 행하는 형태가 많으며, 이는 과거 세시풍속의 첫머리에 놓이는 일반적인 풍습을 반영한 것으로 파악된다. 즉, 정월 초하루 설을 맞아 설 차례를 지내며 조상신을 모시고 나면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동제 날짜를 잡아 금기에 들어갔다. 제관으로 선정된 집안의 경우 바깥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고, 마을 단위에서는 금줄을 쳐 외부인과의 접촉을 경계하기도 했다. 정월 보름 안쪽의 길일을 택해 온 마을이 근신하며 정성을 들이며 준비한 동제는 마을의 1년 길흉화복을 기원하는 중심 행사였다.
예정된 일자에 동제를 지내고 나면 온 마을은 대보름 축제 분위기로 전환되어 마을 화합을 기원하는 놀이마당을 형성하였다. 이처럼 정월 세시풍속의 대보름까지의 기간에 행해지던 풍습이 현재 전승되고 있는 동제의 개최 시기에서도 간접 확인되고 있다. 일부 마을에서는 7월에도 지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보통 칠월칠석이나 백중 무렵이 된다. 김매기까지 끝내 놓은 상태에서 절반 농사를 감사하며 한바탕 놀이마당을 펼치는 시기에 다시 한 번 마을 신께 감사드리는 형태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산신제를 지내는 대표적인 예로 노은면 대덕1구(원통골) 산신제를 들 수 있다. 이 마을은 안쪽의 큰 산으로 원통산이 있다. 원통산 중턱에는 산제당이 마련되어 있는데, 정월 보름 안쪽에 길일을 택해 산신제를 지낸다. 정월이 되어 산신제 날짜가 잡히면 마을 입구에는 금줄이 쳐지고, 선출된 제관의 집과 산제당에도 금줄이 쳐진다. 소임을 맡은 사람들은 일주일간 금기를 지키며 산신제를 준비한다. 제일이 되면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산으로 올라간다.
저녁 무렵부터 산제당을 중심으로 산신제 준비를 시작해 자정이 되면 제를 올린다. 산제당 옆에는 오방신장을 모시는 노천당이 있는데, 제물로 준비한 돼지를 그곳에 놓는다. 돼지고기 한 근 정도를 도려내어 산제당으로 가지고 가 준비된 다른 제물과 함께 놓고 산신께 제를 올린다. 축을 읽고 절을 하고, 소지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기원한다.
산제당에서의 산신제를 마치면 곧바로 바깥 노천당으로 옮겨 오방신장께 제를 올린다. 산제당에서의 산신제가 시작되면, 마을에서는 산제당 불빛을 보며 각각 집안에서도 여러 집안 신에 대한 제를 올린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집에서 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일부에서만 행해지고 있다. 산신제를 중심으로 마을 개별 호수까지 이어지는 형태를 이 마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낭제를 지내는 대표적인 예로 중앙탑면 용전리 갈동의 서낭제를 들 수 있다. 이 마을 역시 정월 초사흘 무렵에 서낭제를 갖는데, 마을 입구 양편에 있는 남서낭과 여서낭을 각각 모신다. 남서낭은 참나무이고 여서낭은 측백나무이다. 정월에 들어서면 소임을 맡은 제관 등은 금기에 들어가며 서낭에도 금줄을 쳐 서낭제 준비를 위해 온 마을이 정성을 쏟는다.
제일에는 낮에 제수용품을 준비하고, 자정이 되면 준비된 제물을 가지고 남서낭부터 제를 올린다. 대동소지를 올리고 개별 호수의 소지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각 집안의 평안을 기원한다. 남서낭에 대한 제를 마치면 제관 집으로 와서 제물을 바꾼다. 바꾼 제물을 가지고 여서낭에 가서 다시 제를 올리고 돌아와 간단한 음복을 하며 마친다. 다음날에는 동네 어른들을 모시고 음식을 나누기도 한다.
산신제가 산제당을 중심으로 하며 서낭제가 서낭당나무를 중심으로 한다면, 충주에는 돌탑을 모시는 특이한 형태의 동제도 있다. 엄정면 원곡리 옥성의 동제가 그것인데, 마을 중심에 쌓아놓은 돌탑을 중심으로 정월 초사흘에 당고사를 지낸다. 이 돌탑은 마을 형성과 관련한 설화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100여 년 전에 아랫마을은 없고 옥성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큰물이 나서 건너편 농토가 쓸려갔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탑을 쌓고 마을의 안전을 기원했다는 데서 유래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하나는 건너편 하일마을의 둑을 헐어다가 돌탑을 쌓으면 옥성마을 사람들이 부자가 되어 하일마을 사람들의 땅을 모두 살 수 있다는 풍수가의 말에 따라 돌탑을 쌓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인이야 어떻든 원곡리 옥성의 돌탑은 충주 지역에 존재하는 동제의 형태로는 특이한 경우에 해당된다. 충청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금강 수계의 동제 형태에서 많이 나타나는 돌탑을 모시는 동제는 다양한 문화적 교섭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양상으로 파악된다.
남한강을 배경으로 강을 대상으로 하는 동제의 경우 엄정면 목계의 부흥당 당고사를 예로 들 수 있다. 목계 지역은 남한강 수운이 활발히 이용되던 시기에 흥성했던 곳으로 목계별신굿과 목계줄다리기 등의 민속 현상이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는 매년 정월 초아흐레에 부흥당 당고사를 지낸다. 부흥산 중턱에 위치한 부흥당은 남한강을 아래로 바라보고 있다.
부흥당 안에는 정면에 서낭각시도가 좌측에 산신도, 우측에 용왕도가 모셔져 있다. 부흥당 문을 열면 정면에 남한강이 펼쳐진다. 마을에서는 전통적으로 서낭각시를 중심으로 부흥당 당고사를 모시며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했고, 목계포구가 흥성했을 당시에는 오가는 뱃사람들이나 떼꾼들이 치성을 드렸던 곳이라고 한다. 또한 최근 조사에서 이곳 부흥당의 경우 한강 유역에 널리 분포하는 ‘부군당(府君堂)’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 남한강 수운을 통한 문화 전파의 한 양상으로도 파악된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동제의 전승 역시 변하고 있다. 도시화에 따른 동 지역의 동제가 파괴되었듯이 면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동제 역시 앞으로의 운명을 가늠하기 어렵다. 마을 단위의 신성시되는 연례 행사이기 때문에 외부의 개입을 꺼리는 경향도 있지만, 지역 문화의 지표이면서 마을 단위의 공동체 의식의 기점이 되는 동제의 보존을 위한 노력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줄다리기]
예전에는 거의 모든 마을에서 줄다리기가 행해졌다고 한다. 마을 내에서 편을 갈라 줄을 당기거나, 마을과 마을의 대결 양상으로도 존재했고, 지역 범위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형태의 줄다리기도 있었다. 현대 충주에서 가장 큰 줄다리기로 통칭되는 것이 목계줄다리기이다. 그러나 이 목계줄다리기는 전통적인 충주줄다리기의 시대적 변형 형태로 파악된다. 실제 충주줄다리기는 1930년대 중반까지 행해졌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959년의 『예성춘추』에는 충주줄다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현 남산국민학교 북쪽 사천교로 통행하는 가도적인 솔정이들에 있었는데 연대는 미상이나 고래로부터 충주읍 지세를 진압하기 위하여 매년 이월이면 반드시 줄다리기를 하는 관습이 있으므로 고북문거리로부터 호암리까지 통행하는 도로를 동서로 분하여 목사는 동편 영수가 되고 영장은 서편 영수가 되어 각기 관할 부락으로 볏짚과 칡넝쿨을 수삼백파식 배당 수합하여 동편 줄은 현 중원군청 전통으로부터 현 농업은행 전통까지, 서편 줄은 현 성서동 홍흥루 전도로부터 현 보인의원 전도까지, 각기 지름 약 90㎝, 길이 약 40m 이상으로 조색한 후 원송정이들에 운반한 후 줄다리기를 하므로 동서편을 막론하고 각기 부락으로부터 농악과 기타 군중이 남녀노소 없이 수만 명 이상이 다투어 운집하여 관광하니 1928년에 현 북문외 교북 백구평(흰갈매기들·야현들)에서 삼개년을 하였다가 1930년에는 교현천과 호암천이 합류되는 현 대가미교서(현 무학시장 일대)에서 하였는데 다음해인 1931년에 폐지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증언들이 연세 높은 어른들을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대개, 대가미, 대가미가 그게 그냥 하천 바닥이거던. 그래 다가미에서 그냥 거기서 했는데, 충주를 갖다가서 충주시군을 다 합쳐서 동서루 나눠. 동서로 나누어서, 그러니까 그 동서가 어떻게 갈는지. 저짝 길, 그 동서의. 그 이름이 뭐라고 해던가? 그 총지휘관이 오기택씨라구, 의사야.(조사자: 오기택씨요?) 응, 오기택. 또 그 반대쪽에는, 반대쪽에는 권태영. 그 내 집안 저건데, 권태영씨. 이렇게 양분해 가지구 했넌데.(조사자: 여기(칠금동쪽)가 서쪽이 됐겠네요?) 응, 그쪽은 인제 권태영씨가 제일 우두머리구, 저짝은 오기택이구. 성격상 둘이 다 아주 그 성격 쌈이 심한 사람들이지. 가차이 다 잘 알면서두. 그런데 그때 그 참여 인구가, 뭐 내가 그때 국민핵교 1학년 당시인가 그러니까, 내 아홉 살 적에 들어갔으니까. 그러니까 이게 80년 전이지. 그 당시에. 에, 내가 알기는 뭐 굉장했었거던. 들판이 뭐, 대가미 들판이 시방 형씨가 생각하는 그 정도가 아니구 들판이거던 그냥. 개천 바닥이야. 거다 해놓구 했는데. 이제 기억나는 건, 각 부락으루다 농악 가지구 와서, 그 싸움은 그땐 그 깃대 꺾는게 이기는 거야. 동네찌리 싸워가지구. (조사자: 깃대 꺾는거요?) 깃대, 그 꺾는다 그러지. 그러니까 깃대를 꺾는데, 깃대가 길면 길수룩 이걸 갖다 보호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의 울타릴 쌓거던. 사람 못뎀비게. 그래 이제 거길 뛰어서 사람 머리 위에 올러가서 이렇게 한번 하면 워낙 크니까 꺾이는 거여. 그래니 판가름이 거서 나구. 그 다음에 꽹과리루다 때리구 이러는 거라. 꽹과리루다. 그래 피가 나구, 이게 있는데.”(권태성 옹 녹취 증언, 당시 90세, 2003년 조사)
줄다리기는 마을 단위 또는 고을 단위의 집단놀이 형태로 파악되기도 하지만, 과거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의 집단의 결속과 화합을 다지는 중요한 행사로 파악된다. 특히 충주와 같은 지역 거점 도시에서는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큰 행사로 발전되었는데, 그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위의 기록과 증언들이다.
충주줄다리기는 기록에서 확인되듯이 충주의 지세를 누르기 위해 관에서 중심이 되어 추진하였고, 관내 모든 마을에서 참여했던 대규모 행사로 파악된다. 특히 정월을 지나면서 매년 2월에 행해졌다고 하는 이 행사는 엄정면 목계리의 목계줄다리기에서 그 잔존 또는 계승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목계줄다리기는 보통 목계별신굿과 함께 논의된다. 엄정면 목계 지역이 수운의 활성화에 힘입어 남한강 유역 최대 포구로 흥성했던 시기에 행해졌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목계별신굿과 목계줄다리기는 시대 변화상을 반영하는 현상으로 파악된다. 즉 충주가 충청도 행정 수부로 존속되던 시기에는 지역의 중심 기능을 수행하면서 재정적 지원이 수반되었던 충주줄다리기를 개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상권의 형성과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인해 전통적이며 공동체적인 행사는 폐지되면서 그 형태의 잔존이 목계 상권을 중심으로 이동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까지만 해도 남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최대 물산이 집중되었던 목계에서 연초에 상권 진작을 목적으로 개최되었던 별신굿과 함께 전래의 집단놀이였던 목계줄다리기가 원용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충주줄다리기가 충주 관할 지역의 동서편이 나뉘어 줄을 당기던 것처럼, 목계줄다리기는 목계 상권을 중심으로 동서편이 나뉘어 줄을 당겼다고 한다. 큰 줄을 매기 위한 금전적인 지원과 기술이 과거에는 관을 중심으로 행해졌다면, 충주줄다리기의 전승이 차단된 후에는 목계 상권을 중심으로 후원 세력을 얻어 계승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1950년대를 지나면서 파괴되었으나 목계줄다리기는 최근 들어 목계를 중심으로 일부 복원되고 있다. 목계별신굿보존회를 중심으로 목계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고, 정책적 차원에서의 목계문화마을 조성사업이 진행되면서 목계줄다리기가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라져가는 문화 현상에 대한 복원과 전승의 청신호로 여겨지며 보다 체계적이고 발전적인 계승 방법을 찾아 충주 지역의 전통 민속놀이로서 공동체 의식의 회복은 물론 대표적인 문화 행사로 발전시킬 필요성이 있다.
[목계별신굿]
엄정면 목계리에서 있어 왔던 목계별신굿(목계별신제)은 현재로서는 재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목계별신굿에 대한 조사와 복원 노력은 민속학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지역 민속의 현대적 계승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사항이다. 목계별신굿에 대한 현지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40년대까지 존속되었고, 목계의 상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충주 지역의 굿 문화와는 다른 형태의 팔도 굿이 모두 모였다는 증언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굿의 형태와 굿을 주재했던 무속 집단의 추적은 불가능한 상태여서 완전한 복원은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목계별신굿은 부정기적인 행사로 진행되었다. 마을에서 본래 행해지던 부흥당 당고사가 매년 정월 초아흐레에 있고, 열나흘에는 용왕제인 뱃고사를 행했으며, 뒤이어 보름부터는 줄다리기 행사가 있어 왔다. 여기에 목계포구가 남한강 최대 상권 지역으로 부상하면서 상권 진작을 목적으로 하는 별신굿이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계별신굿의 후원 집단은 남한강 상권을 주도하던 상인 세력이었으며, 주관은 목계마을에서 이루어졌다. 목계별신굿의 주재 집단은 무속인으로 충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아니고 서울의 상인 집단과 연계된 무속 집단으로 여겨진다.
별신굿은 정월 보름께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월초파일에도 열렸다고 한다. 별신굿이 펼쳐지면 목계나루터에 임시 당집을 짓고 주변에는 여러 가지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펼쳐진 난장이 열렸다고 한다. 별신굿의 구체적인 연행 방식에 대해서는 주재 무속 집단을 확인하지 못하는 관계로 그 실체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몇몇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커다란 굿판이 벌어졌고, 경우에 따라서는 팔도 무당이 모두 모였다는 조금은 과장된 증언도 들을 수 있다.
목계별신굿은 여러 가지 정황상 일제강점기에 발달했던 장별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규모 장에서 펼쳐지는 난장 놀이판과 다른 점은 목계가 가졌던 상권 중심지로서의 위상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어느 시기에 남한강 수운이 풀리면서 본격적인 거래가 시작될 즈음에 최대 상권지였던 목계에서 펼쳐진 축제적 의미가 강하다. 남한강 유역의 상권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고, 한바탕 놀이마당이 펼쳐지면서 상권 진작의 목적을 가진 상인 집단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 의미에서 목계별신굿은 남한강 유역에 존재하는 별신굿과도 구별된다. 남한강 유역의 충청북도 북부 지역에는 목계별신굿 뿐만 아니라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의 오티별신제가 있고, 단양군 대강면 성금리의 성금별신굿이 있다. 현재 오티별신제를 제외하고는 전승이 중단된 상태인데, 오티별신제가 마을 단위의 산신제와 서낭제의 혼합 형태를 띠고 있고, 성금별신굿의 경우 9년 주기로 무당을 불러 굿을 하지 않으면 마을에 재앙이 든다는 이유에서 행해졌던 것과 비교해 보면, 목계별신굿은 상업적 목적에 의해 일정 시기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형태의 행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주로 해안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분포를 보이는 대규모 별신굿이 내륙 포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상권 중심지에서 행해졌던 큰 굿 형태였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목계별신굿의 재구는 어렵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목계별신제라는 이름으로 재현되어 행해지고 있다. 우륵문화제의 한 행사로서 양진명소오룡굿과 함께 격년으로 재현되고 있으며, 경신회 충주지부 및 한국예총 국악협회에서 이를 주관하고 있다. 최근에는 목계를 중심으로 하는 보존회가 구성되어 목계문화마을 조성 및 복원의 일환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이 뒤따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부분적이나마 갓채나 행장떡국과 같은 목계별신굿과 관련이 있는 전통 음식이 재현되었고, 쇠고리마빡치기와 같은 놀이도 복원되는 성과를 낳고 있다. 목계별신굿의 재구와 재현, 나아가 전통 복원의 노력은 비단 목계 지역의 문화적 전통의 복원에만 머물지 않으며 충주는 물론 남한강 유역의 문화를 재구하는데 크게 일조할 것으로 기대된다.
[「중원마수리농요」]
전통적인 농경 민족인 우리 민속에는 많은 노동요들이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농촌현대화와 일손 부족에 따른 급격한 기계화로 인해 전통의 맥을 찾아보기 힘들다. 충주 지역에도 농사와 관련된 전통 노동요가 충청북도 무형문화제 제5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바로 「중원마수리농요」이다.
「중원마수리농요」는 1994년 12월 30일에 충청북도 무형문화제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잊혀져가던 것을 1970년대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마제마을 사람들이 재연하여 보존해 오고 있다. 1972년에 「탄금대 방아타령」이라는 이름으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중원마수리농요」의 구성은 ‘절우자(모찌는 노래)’, ‘아라성(모심기 노래)’, ‘방아호우(김매기 노래로 긴방아, 중거리, 자진방아로 나뉨)’, ‘대허리(두벌매기로 긴방아와 자진방아로 나뉨)’를 마치고 ‘방아 타령’과 ‘방아찧기 노래’를 여성부와 같이 한 뒤 남녀가 어울려서 한마당 놀이를 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초대 기능 보유자 지남기가 2005년에 사망하고, 현재는 메김소리 예능 보유자인 박재석이 맥을 잇고 있다. 충주시에서는 2007년에 5,000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중원마수리농요」 12꼭지를 담은 영상물을 제작하여 보존을 지원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개인 놀이에서부터 집단 놀이에 이르기까지, 집안 행사에서부터 마을 행사에 이르기까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많은 민속 현상들은 시대 변화에 따라 잊혀져가고 사라져가고 있다. 채 정리하기도 전에 사라진 것들도 있고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것들도 있다. 마을 단위의 전통이기 때문에 ‘내 대(代)까지는 지켜야지’하는 소명 의식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많은 민속 현상들이 정리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 중원 문화의 중심 지역으로 평가되는 충주의 경우 보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민속 문화에 대한 조사 정리가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승 방법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시급히 서둘러야 할 것이 민속지 작업이다. 면 단위의 면지(面誌) 제작이 최근 몇 년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일면 반가운 현상이다. 하지만 지역 전체를 비교하며 문화적인 교섭 관계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지역 단위의 민속지 편찬이 우선 급한 일로 판단된다. 내 고장의 전통을 담아내고 그 전통 속에 현재를 살아갈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관심 있는 사람들과 행정 관서에서의 뒷받침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