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1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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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修 |
영어음역 | Han S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미숙 |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 명필가.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字)는 맹운(孟雲)이며, 호는 유항(柳巷)이다. 한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평간공(平簡公) 한공의(韓公義)이며, 중찬(中贊) 한악(韓渥)이 할아버지이다. 그의 아들은 한상환(韓尙桓), 한상질(韓尙質), 한상경(韓尙敬), 한상덕(韓尙德)이다.
[활동사항]
1347년(충목왕 3) 나이 15세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필체가 뛰어나 충정왕이 그를 정방(政房)의 필도지(必道赤)로 임명하였는데, 왕이 왕위를 내어놓고 강화도로 쫓겨날 때 왕을 수종(隨從)하여 사람들의 숭앙을 받았다. 공민왕(恭愍王)이 그를 불러 다시 필도지로 삼았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대언(代言)으로서 관리의 선발과 임명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는 신돈(辛旽)이 왕에게 신임과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왕에게 “신돈은 바른 사람이 아니므로 국가에 변란을 초래하게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말을 하였다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전직되기도 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죽음을 당한 후에 왕이 한수(韓脩)가 앞일을 내다보는 밝은 식견이 있었다라고 하면서, 이부상서(理部尙書),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로 등용하였다가, 다시 우승선(右丞宣)에 임용하여 관리의 선발과 임명을 주관케 하였다.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으로 승진시켰다가, 얼마 후 반역을 꾀한 한안(韓安)의 일족이라 하여 지방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그 후 상당군(上黨君)으로 책봉되었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다시 청성군(淸城君)으로 책봉되어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로 있다가 1384년 52세로 죽었다.
[상훈과 추모]
국가에서 장례를 치렀으며,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다.
[저술]
저서로『유항집(柳巷集)』이 있다.
[작품]
한수는 초서와 예서를 잘 썼는데, 그의 작품으로는 「노국대장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 「회암사지공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한수는 매우 학식이 높았으며, 의리에 맞게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 왕에게도 직언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매우 존경하며 추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