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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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尙質 |
영어음역 | Han Sangji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석린 |
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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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문열(文烈) |
몰년 | 1400년 |
본관 | 청주(淸州) |
자 | 중질(仲質) |
호 | 죽소(竹所) |
출신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
아버지 | 한수(韓脩) |
어머니 | 권적(權適)의 딸 |
아우 | 한상경(韓尙敬) |
[정의]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중질(仲質), 호는 죽소(竹所)이다. 호부상서(戶部尙書) 한공의(韓公義)의 손자로 지금의 상당구 방서동에서 태어났다. 판후덕부사 한수(韓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길창군 권적(權適)의 딸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한상경(韓尙敬)이 그의 아우이고, 세조 때 공신 한명회(韓明澮)는 그의 손자이다.
[활동사항]
1390년(공양왕 2) 6월 천추사로서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의 거짓을 변명하고 돌아와, 12월에 서북면도관찰출척사 겸 병마도절제사를 지냈다. 1392년(태조 1) 7월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를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국호의 결정을 요청하여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결정받고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그가 중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에 기로(耆老)와 백관(百官)이 도당(都堂)에 모여 국호를 의논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의 고향인 화령(和寧)과 단군·기자(箕子)·위만의 세 조선을 상징하는 조선이라는 두개의 칭호를 가지고 명나라 황제에게 품의한 결과, ‘조선’이라는 칭호가 아름답고 유래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국호로 선정하였다.
명나라는 기자조선을 의식하고 ‘조선’이라는 칭호를 새 왕조의 국호로 선정하였으나, 조선 측에서 생각하는 ‘조선’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문화전통을 동시에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의 후보로 추천한 것이다. 그것은 국호를 제정하기 이전인 1392년 8월에 이미 단군을 동방에서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로 국가에서 평양부로 하여금 시제(時祭)를 지내도록 조처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1393년 9월 양광도관찰출척사가 되고, 1397년 경상도관찰출척사를 거쳐, 이해 예문춘추관대학사가 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치적을 많이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