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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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康 |
영어음역 | Han Gang |
이칭/별칭 | 한경(韓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미숙 |
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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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 미상 |
몰년 | 1303년 |
본관 | 청주(淸州) |
초명 | 경(璟) |
출신지 | 청주 |
시호 | 문혜(文惠) |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초명은 경(璟)이다.
[경력]
고종 때 감찰어사(監察御使) 예부낭중(禮部郞中), 원종(元宗) 때 공부시랑(工部侍郞)·간의대부(諫議大夫),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충렬왕(忠烈王) 때 세자조호(世子調護),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좌상시, 판삼사사(判三司事), 재추소사존(宰樞所司存),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 첨의중찬(僉議中贊)을 보냈다.
[활동사항]
청주사람으로 고종(高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내고,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금주(김해)의 수령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금주에는 전부(田賦)가 항상 규정된 수량에 도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수령들이 많이 파직을 당하는 자가 많았다. 그런데 한강이 부임하여 폐지하였던 둔전(屯田)을 개간하여 곡물 2,000여 석을 얻어 내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이렇게 지방관으로 백성들을 잘 다스리니, 다시 예부낭중(禮部郞中)에 임용되었다. 그 후 공부시랑(工部侍郞)·간의대부(諫議大夫)를 거쳐 1271년(원종 12)에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으로써 국자감시험에서 양순(梁淳) 등 53명을 뽑기도 하였으며,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어 충청도·교주도에 파견되어 군마의 사료를 장만하기도 하였다.
또 1281년에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와서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전임되었는데, 새로 설치된 재추소사존(宰樞所司存)을 겸임하여 국사를 논의하는 일을 주관하기도 했다. 1284년에는 감수국사(監修國史) 원부(元傅), 수국사(修國史) 허공(許珙)과 함께 『고금록(古今錄)』을 편찬하였으며, 1287년(충렬왕 13)에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가 되었다가 사임하였으나, 뒤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승직시켜 사임하게 하였다.
후에 왕이 한강을 불러 실행하여야 할 만한 일들에 대해 말해줄 것을 요청하니, 한강이 종묘를 보수하고, 악기들을 갖추어 시절마다 진행하는 제사를 엄격히 절차대로 지낼 것과 여러 관사들에서 시장의 물품들을 낮은 값으로 강제 매상하는 것을 금지할 것과 사냥 등의 오락을 중지할 것, 맛있는 음식들을 절약해서 쓰고, 아주 추울 때나 더운 여름에 죽을 끊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할 것 등을 청하였다. 1303년에 죽었다. 시호를 문혜(文惠)라 하였다.
[의의 및 평가]
백성들의 사정을 잘 살펴 다스리는 청백리였으며, 왕이 국사의 일을 주관케 하거나 간언을 요청할 정도로 강직하고 충직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