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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736
한자 豪族
영어음역 Hojok
영어의미역 local gent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이병희

[정의]

신라말·고려초 사회변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지방세력.

[개설]

신라말 진골귀족 내부 정쟁으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독자적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지방으로 낙향한 진골귀족이나 6두품 계통, 지방의 토착세력인 촌주, 해상 세력, 지방군사 세력에서 기원하고 있다. 이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스스로 장군이나 성주를 자처하였다.

호족은 대토지를 지배하고 있고, 사병(私兵)을 중심으로 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앙과 비슷한 관부 조직을 갖추고 지역민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주치(州治)나 소경(小京)이었던 지역의 일부에서는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학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활동사항]

이들은 사회변동을 주도하였고, 신라왕조의 존립을 위협하였으며, 골품제를 타파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새로운 세력으로서 고려왕조를 성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호족 출신인 태조(太祖)는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다른 호족들을 끌어들이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고려왕조 성립 후 이들은 중앙으로 진출해 문벌귀족화하는 부류와, 지방에 남아 향리화의 길을 걷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대부분 후자의 길을 걸었으며, 이들은 과거와 천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하였다.

[청주의 호족]

신라말·고려초 청주 호족은 스스로 관부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당대등(堂大等)·대등(大等) 휘하에 병부(兵部)·창부(倉部) 등의 관부가 있었다. 용두사 당간기에 따르면 지방학교인 학원을 설치운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904년 궁예(弓裔) 정권 하에서 청주인호 1천을 철원으로 사민(徙民)시켰는데 이것은 궁예 정권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청주의 호족은 철원으로 옮겨간 재경세력과 재지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궁예 정권 하에서 청주인들은 친궁예파가 중심이었지만, 친왕건파도 없지 않았다.

왕건(王建)이 918년 집권한 직후에 청주에 친행하여 위무하였으며 축성하기도 하였다. 청주의 친궁예세력은 왕건에 반발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이 모반을 시도하였고, 청주수(淸州帥) 진선(陳瑄)·선장(宣長) 형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에도 청주세력들은 계속해 왕건견훤(甄萱) 사이에서 반부(返附)를 거듭하였다.

왕건의 청주에 대한 회유와 견제는 지속되었다. 930년 이후 청주세력은 왕건 세력에게 완전히 귀부하여 더 이상 적대세력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962년에 세운 철당간은 김예종(金芮宗)이 발원하여 김희일(金希一)이 완성하였다. 당간의 명문에 향직자로 김(金)·손·경(慶)·한(韓) 4개 성씨가 보인다. 이 가운데 당대등 · 대등과 같은 최고위직을 점하고 있는 층이 청주김씨(淸州金氏)였다. 고려초에는 청주김씨가 청주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청주출신의 김긍율(金兢律)은 혜종(惠宗)·정종(定宗) 양대에 걸쳐 납비(納妃)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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