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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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음역 | Imjinwaeran |
영어의미역 |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석린 |
발생(시작)연도/일시 | 1592년~15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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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장소 | 조선 |
관련인물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허성|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토 기요마사|구로다 나가마사|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정발|심유경(沈惟敬)|이일|신립|유성룡(柳成龍)|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이순신(李舜臣)|원균(元均)|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조헌(趙憲)[1544~1592]|휴정(休靜)|유정|조승훈(祖承訓)|송응창(宋應昌)|이여송(李如松)|권율(權慄)|처영|김시민(金時敏)|진린(陳璘)|이몽학(李夢鶴)|송유진(宋儒眞)|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조약/협상대상자 | 심유경(沈惟敬)|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겐소(玄蘇)|황진 |
[정의]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朝鮮)에 침입한 왜군(倭軍)과의 전쟁.
[개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朝鮮)에 침입한 왜군(倭軍)과의 전쟁이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은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이라면 정유재란까지 포함해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이라 부른다.
[조약/협상내용]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임진왜란 전에 쓰시마섬(對馬島)주인 소 요시토시(宗義調), 겐소(玄蘇) 등을 보냈는데,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서 명(明)나라를 치자는 데 있었다. 이에 쓰시마섬주는 가신(家臣)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조선과 일본간의 사이를 좋게하고, 통신사(通信使)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서신에 오만무례한 구절이 있어 조선정부는 이를 거절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쓰시마섬주를 통하여 재차 교섭을 청하면서, 교섭이 뜻대로 안되면 병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침략의 뜻을 내보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1590년에 일본사신 방문에 대한 답방을 겸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저의를 살피기 위해 통신사 일행을 선정했는데,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을 결정하여 일본으로 보냈다.
이듬해 3월 통신사 편에 보내온 일본의 답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문자가 있어 그 침략의 의도가 분명했으나, 사신들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고 조신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결국 조선과 일본과의 협상이 결렬되고 전쟁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宣祖)는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명나라의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군의 참전이 결정되고,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강화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8월 29일에 심유경(沈惟敬)이 명나라 대표가 되어 화의의 교섭을 맡게 된다. 11월 14일에 평양성으로 가서 화의를 교섭하나 실패한다.
그 후에 2, 3년 간 사신이 왕래하였으나, 화의는 진전이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①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맞을 것, ② 감합인(勘合印 :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③ 조선 8도 중 4도를 양도할 것, ④조선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구하면서, 붙들려갔던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명나라의 허가를 받았다. 이에 1596년 명나라의 사신을 보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임명한다는 칙서와 금인(金印)을 전달하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하여 사신을 돌려보내고 조선에 대한 재침공을 꾀하였다.
이에 심유경은 본국에 돌아가서 국가를 기만하였다는 죄로 사형을 당하고, 협상은 완전히 결렬되고,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 조선의 정세는, 정치적으론 연산군 이후 명종(明宗)[1546~1566]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세력간의 정쟁으로 인한 중앙정계의 혼란, 선조 즉위 이후 사림세력의 득세로 인하여 격화된 붕당정치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군사적으로는, 조선 초기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의기관을 설치하여 빈번한 외침에 대비해 왔으나, 이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럴 즈음,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국내통일에 성공한 그는 오랫동안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통일 이후 각 제후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안전을 도모하며 신흥 상업세력 억제를 위하여 대륙침략을 꿈꾸게 되었다.
[발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정군을 편성하고 1592년 4월 침공을 명했는데, 이때 일본의 총병력은 약 20여 만 명이나 되었다. 4월 13일 경상도 가덕도(加德島) 응봉봉수대(鷹峰烽燧臺)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兵船)이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도·전라도의 각 감영(監營)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의 약 1만8000명의 병력이 부산진첨절제사 정발(鄭撥)이 지키는 부산성(釜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튿날 동래(東萊)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東萊府使)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 이하 군민(軍民)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뒤따라 들어온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과 합세하여 3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대장으로 하는 제1군은 중로(中路)를 택하여 양산(梁山), 밀양(密陽), 청도(淸道), 대구(大邱), 안동(安東), 선산(善山), 상주(尙州), 문경(聞慶) 등을 거쳐 충주(忠州)에 이르렀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하여 경상좌도를 택하여 울산(蔚山)을 함락하고 경주(慶州), 영천(永川), 군위(軍威)를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 서울로 진군하였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동래(東萊)에서 김해(金海)로 침입하여 경상우도를 따라 올라와 성주(星州)를 지나고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북상하였다.
[경과]
적이 침입했다는 급보가 조정에 알려지자, 급히 그 대책을 논의한 끝에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임명, 조령(鳥嶺), 충주 방면의 중로를 방어하도록 했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하여 죽령(竹嶺), 충주 방면의 좌로를 방어하게했으며, 유극량(劉克良), 변기(邊璣) 등에게는 각기 죽령, 추풍령을 방비하게 했다.
한편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뒤를 이어 보내고,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로 삼아 제장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 기요마사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 조령, 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보는 민심을 극도로 동요시켰고, 선조는 마침내 서울을 떠나 개성, 평양 방면으로 향하며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게 했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왕의 피난으로 백성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下三道)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民)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掌隷院)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5월 2일 서울을 함락, 본거지로 한 뒤 평안도로 북상하였고,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 나가마사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평양(平壤)을 위협하였고, 선조는 다시 의주(義州)로 피난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6월에 평양을 점령했으며,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는 회령(會寧)에서 두 왕자를 붙잡았고 함경도 일대를 정복했다.
한편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水營)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비록 해상에서의 첫 해전에서는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대패로 일본군이 상륙할 수 있었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활약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일본군의 해상활동이 차단되고 보급로가 끊어졌다.
이순신은 원균의 구원을 요청받고 거북선을 등장시켜 여수를 출발하여 경상도 해안에서 일본수군을 격파하였다. 1차는 옥포(玉浦)에서, 2차는 사천(泗川), 당포(唐浦)에서, 3차는 한산섬 앞바다에서, 4차는 부산해전에서 일본의 수군을 대파, 큰 전과를 올려 제해권(制海權)을 완전히 장악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김해성(金海城)의 저항, 경상우방어사 조경(趙儆)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鄭起龍)의 추풍령 전투, 밀양 작원(鵲院)에서의 밀양부사 박진(朴晉)의 선전, 유도대장 이양원의 해유령(蟹踰嶺)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또한 국내 각처에서는 왜병의 침략행위에 대한 민족적 항거로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은 양반계층에서 천인신분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하였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호서에서는 조헌(趙憲)[1544~1592]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鄭文孚)가 거병하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沃川)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錦山)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에서 거병하여 의령, 창령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鏡城), 길주(吉州)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도 대소의 허다한 의병이 봉기했으며 휴정(休靜), 유정(惟政)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여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왜군의 군사행동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한편, 선조는 피난하는 도중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는데, 명나라에서는 파병 여부의 의논이 분분했으나,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원병을 파견했다. 요양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5,0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평양을 공격했으나 패하자 명나라에서는 심유경을 보내어 화의를 제창하게 하는 한편 송응창(宋應昌)·이여송(李如松) 등으로 하여금 4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을 공격하게 하여 이를 탈환하고 서울로 향했다.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碧蹄館)에서 왜군에게 패하여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權慄)이 이치(梨峙)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패퇴하자 고립되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處英)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서울 철수명를 서두르게 되었다. 임진강을 끼고 조선, 명의 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퇴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는데 김천일,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등이 분전했으나 함락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싸움은 행주싸움에 못지않은 격전이었고 특히 제1차 진주성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에 든다.
조선측의 강화반대에도 불구하고 명군은 심유경을 서울의 왜진에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자, 왜군도 각지의 의병봉기와 명군의 진주, 보급곤란, 전염병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응하였다. 명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은 진척되어 우리측에서도 황진을 통신사로 보내게 되었다.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명은 왜군의 재공격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화의는 결렬되어, 1597년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金烏), 공산(公山),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楊鎬)를 경리,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명도 즉시 출동하였다.
왜군은 임진년 당시와는 달리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말부터 좌군은 남해(南海), 사천(泗川), 고성(固城), 하동(河東)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光陽), 순천(順天), 김해(金海), 창원(昌原) 방면에서, 가토는 밀양(密陽), 초계(草溪), 거창(居昌)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왜군은 황석산성(黃石山城)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高靈)에서 상주목사 정기룡 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稷山) 싸움에서도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 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명나라 연합군이 총반격을 가하여 9월의 소사전투(素沙戰鬪)에서 크게 승리하고, 해전에서는 이순신이 일본군을 대파하여 왜군은 조선의 육·해군에 의하여 봉쇄되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게 되자 이를 계기로 왜군의 가토가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서 퇴각하고,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도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자 왜의 수군 300여 척이 이를 후원하려 노량(露梁)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에서 승리하고 전사하였다. 그리하여 1598년(선조 31)11월에 7년 동안의 전란이 완전히 끝났다.
[결과]
전후 7년 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 명나라, 일본 등 3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문란했던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 인명 손상은 물론 전야(田野)의 황폐가 전국에 미쳐 납속책(納粟策)을 실시하게 되었다.
따라서 위정자들의 급선무는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얼허통(庶孼許通), 향리의 동반직(東班職) 취임, 노비를 양인으로 삼는 등 종래 신분상의 제약이 느슨해져갔다. 정치·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비변사(備邊司)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백성의 생활은 처참하여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고 민란이 일어났으며, 송유진(宋儒眞)의 난과 이몽학(李夢鶴)의 난은 왜란 중에 있었던 대표적인 반란으로, 일반 민중에 끼친 영향이 컸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불국사를 비롯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 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그리고 역대실록 중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하였던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한편 국방의 중대성을 절감하고 병제의 개편과 무기개발에 착수했으며, 병술을 개혁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삼수병(三手兵)을 두고 무예를 조련하게 하였다. 새로운 무기로서 비격진천뢰·화차 등을 발명했고, 조총을 제조하고 불랑기(佛狼機)를 모조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으로 질병퇴치를 위한 의학서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이 편찬되었고, 사상적인 측면으로는 의병·승병을 통한 애국심의 발로와 자아반성이 이루어졌다.
또한 난을 통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이 고취되고 일본에 대해서는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지기도 하였으나, 민간신앙으로 관우(關羽) 숭배사상이 일어나는 등 명나라에 대한 사대사상이 더욱 굳어진 것도 사실이다.
일본 역시 국민생활이 피폐하고 봉건제후의 세력이 약화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 하여금 국내정복을 가능하게 하여 중앙집권제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많은 조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가서 경작·노동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기도 하였으며,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도자기 제조기술을 전수하여 도자기기술에 큰 발전이 있었고, 또 활자를 가져가서 일본활자기술이 크게 발전하였으며, 약탈하여 간 많은 서적은 성리학(性理學) 등 그들의 학문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소모하였으므로 국가재정이 문란하게 되었으며, 만주(滿洲)의 여진족이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명, 청(淸) 교체의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은 3국의 내정은 물론 동양의 국제정세를 전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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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9 | 본문 내용 수정 | 1) 장례원(掌隷院)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 창덕궁 둥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장례원(掌隷院)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2)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김해성(金海城)의 저항, 경상우방어사 조경(趙儆)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鄭起龍)의 추풍령 전투, 밀양 작원(鵲院)에서의 밀양부사 박진(朴晉)의 선전, 유도대장 이양원의 해유령(蟹踰嶺)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김해성(金海城)의 저항, 경상우방어사 조경(趙儆)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鄭起龍)의 추풍령 전투, 밀양 작원(鵲院)에서의 밀양부사 박진(朴晉)의 선전, 유도대장 이양원의 해유령(蟹踰嶺)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김해성(金海城)을 인명 태깅하였으나 지명임으로 태깅 수정하였음. 3) 권율은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處英)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권율은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處英)과 함께 약 2,300명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4) 양호(楊鎬)를 경리,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도 즉시 출동하였다. ->양호(楊鎬)를 경리,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명도 즉시 출동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