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187
한자 淸州邑城
영어음역 Cheongjueup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북문로|서문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차용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시기/연도 조선시대
둘레 1,783m
높이 4m

[정의]

조선시대 청주관아(官衙)와 민거(民居)를 둘러쌓은 성.

[개설]

읍성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기능을 담당하던 성이다. 우리나라 역사서로서 가장 오래된『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신라 685년(신문왕 5)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689년 윤(閏) 9월 26일에 서원경성을 쌓았던 기록이 있어 청주읍성의 전신은 아마도 통일신라가 구주오경제(九州五京制)를 갖추던 신문왕대 특히 685년부터 689년까지에 걸쳐 축조되었다고 여겨진다. 우리나라 읍성으로서 축조연대를 문헌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성에 속한다.

통일신라에서 중요한 지방 도시에 해당되는 9주와 5소경의 도시 구조는 문무왕~신문왕대에 이르러 주성(州城)과 소경성(小京城)의 축조가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축성은 도시의 방어목적과 보민용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연구 결과에 의하면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과 평지의 시가지 계획이 실시된 유형에 있어, 여기에 남원소경(南原小京)[지금의 남원]·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청주(菁州)[지금의 진주]가 속하는데 시가지는 방리제(坊里制)가 채택되어 160×160m 크기의 방과 시가지 중앙에 폭 80m의 남북대로가 있어 좌우 대칭 모양으로 되어있고, 다음으로 시가지가 성으로 둘러싸여 나성형식을 가진 유형이 서원·국원(國原)[지금의 충주]·북원(北原)[지금의 원주]·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하서주(河西州)[지금의 강릉] 등이라 한다.

[위치]

청주읍성은 보통 조선왕조시대의 청주목(淸州牧)의 읍성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청주읍성은 현재의 청주 시가지에서 무심천(無心川)[옛 대교천]의 동쪽에 있으며 고려시대부터 있어온 성터가 기본이 되어 조선시대에 이어진 것이었다.

[건립경위]

청주읍성에 관한 것은 고려 태조대에 나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상당산성에서 「사량부속장지일(沙梁部屬長池馹)」의 명문와가 출토되기도 하였으므로 7세기 후반의 서원경성이 어떤 것인지 알기 어려우나, 읍성 자체가 서원경성이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읍성 내에 있는 고려 초의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鐵幢竿)은 고려 초부터 이곳이 읍치의 중심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며, 청주시의 읍성이 있던 지역의 도로망이 남문에서 북문까지의 대로를 중심하여 방격(方格)으로 짜여져 있는 것은 고대의 경성방리제(京城坊里制)를 방불케 하는 바가 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와 청주읍성의 축성기사가 비교적 명확하여, 시축 시기에 혼동을 가져왔으며, 고려시대 읍성이 홍수로 말미암아 훼손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토루로 된 읍성을 석축으로 고쳐 쌓은 연대는 불명확하나 1487년(성종 18)에 완공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형태]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서는 읍성은 석축이고 둘레가 1,084보인데, 성 안에 우물 13개가 있어 사철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둘레가 3,648척, 높이 8척, 『성종실록(成宗實錄)』에서는 둘레 5,443척, 높이 13척,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1,427보라 하여 각기 차이가 있다.

필사본으로 남아있는 『청주읍지(淸州邑誌)』의 성지(城池)에서 읍성을 「돌로 쌓고 1,350보이다. 포루가 8곳인데 다만 두 곳이 남아있다. 높이는 8자이며, 성안에 우물 13개가 있다. 여장은 566타가 있고, 서문·남문·북문은 모두 아치식이며, 또한 문루가 있으나, 동문은 홍예를 틀지 않았고 문루도 없다.」라 하였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용척(用尺)의 차이와 성문의 옹성과 문구부(門口部)의 포함여부에 따른 차이로 여겨지며, 대체로 둘레 1,640m, 성벽 높이 4m 규모였다고 여겨진다. 임진왜란 때에는 읍성을 점령한 왜군을 의병군이 탈환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청주읍성도(淸州邑城圖)』가 전라남도 구례의 운조루에 남아 있어 조선시대 후기의 읍성내 건물의 배치와 민가의 존재 상황을 대략 알 수 있다.

[현황]

한편, 1910년 국권 피탈로 관찰부 대신 도청이 청주에 설치되었고, 1911년 4월 착공하여 1915년에 마친 시구 개정사업을 명분으로 하여 먼저 사방의 성벽을 헐어 그 돌을 이용하여 하수구를 만들고 남석교에서 일직선으로 남문을 경유하여 북문으로 통하는 간선도로 즉 성안길(중앙로)을 개수하였다.

따라서 그 성벽 자리는 지금까지 도로의 구실을 하였으므로 성벽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처럼 일제에 의해 헐려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나 읍성이 존재했던 터전을 알 수 있고, 과거 읍성의 존재에 대하여는 문헌기록이 남아있다. 현재의 청주시는 읍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도시로서의 면모를 확연하게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읍성이 아닌 다른 유적들을 통하여 역사도시로서의 면모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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