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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291
한자 橘林書院
영어음역 Gyullimseowon
영어의미역 Gyulrim Seowen|Gyulrim Confucian Academy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2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동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서원
건립시기/일시 1578년(선조 11)연표보기
소재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21 지도보기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 안에 있는 조선 시대 유교 교육 기관.

[개설]

귤림서원은 조선 시대 초기 및 중기에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했던 오현(五賢), 곧 충암 김정·규암 송인수·동계 정온·청음 김상헌·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유교 교육 기관이었다.

초기의 학생수는 20여 명 정도였으나 이후 35명까지 늘어났으며,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원되기 전까지 오현사와 영혜사, 향현사 등 하나의 본사와 2개의 별사, 그리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장수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주시에 의해 2004년부터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변천]

귤림서원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뒤 사사된 김정(金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578년(선조 11) 판관 조인후가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를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1659년(효종 10) 제주목사 이회가 장수당을 건립하고, 1665년(현종 6) 판관 최진남김정의 사묘를 장수당 남쪽으로 옮기면서 사(祠: 충암사)와 재(齋: 장수당)를 갖춘 명실 상부한 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1682년(숙종 8) 예조정랑 안건지가 제주도에 파견되어 ‘귤림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며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의 위패를 모시도록 하였다. 뒤이어 1695년(숙종 21) 송시열도 함께 모시면서 오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원되었는데, 1892년(고종 29) 제주 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2000년 이후 귤림서원 복원 작업에 들어간 제주시는, 2004년 10월 학생들이 공부하던 장수당과 협문 1채, 돌담 110m 등을 완성한 데 이어, 2007년 8월 향현사 복원을 마무리지었다.

[현황]

2004년 복원된 장수당 옆으로 2007년 8월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한 향현사가 서 있다. 향현사는 한식기와 중와잇기 팔작지붕에다 홑처마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조선 시대 사당으로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유학과 유교 문화의 전당으로 제주 유생들의 지주 역할을 하였던 귤림서원이 복원됨으로써 제주 선현의 정신을 되살리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 김봉옥, 『제주통사』(제주문화, 1987)
  • 제주 MBC(http://www.chejum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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