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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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麗水興國寺重修事蹟碑 |
영어의미역 | Stele Commemorating the Rebuilding of Heungguk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7[흥국사길 160]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진옥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1년 12월 20일 -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2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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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성격 | 탑비 |
건립시기/일시 | 조선 중기 |
관련인물 | 보조국사 |
높이 | 270㎝ |
소재지 주소 |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7[흥국사길 160] |
소유자 | 흥국사 |
문화재 지정번호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 중기 석조 탑비.
[위치]
원래는 사찰의 정문인 영성문(迎聖門) 건너에 있었으나 수해로 인해 현재 영성문은 없어졌다. 현재 사찰경내로 진입방향 영취교 직전 왼쪽에 있다.
[형태]
귀부의 지대석은 보이지 않는다. 흙바닥 위에 그대로 놓여 있어 바닥이 다소 거칠고 난삽해 보인다. 귀두가 유달리 크고 불균형하여 기이한 느낌을 준다. 귀갑의 6각형 기하학적 무늬는 뚜렷하지 않으며 약간 불규칙하다. 머릿돌 하단에는 간략하고 형식적인 연화무늬 띠를 둘렀고, 그 중앙에는 민화에서 볼 수 있는 다소 과장되고 해학적인 모양의 이수(螭首)가 둘 조각되어 있다. 2011년 12월 20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이수는 하단부가 많이 파괴되어 자세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비신의 전면 하단에는 1단의 방형 꽃구름 문양대로 구획하고 양 측면과 중앙에 솟아오르는 꽃구름을 표현하였다. 중앙에는 제액의 표현이 없이, 중앙에 구형의 보주를 양각하고 구름 속에서 나타난 두 마리 반룡이 쟁주하는 모습이다. 측면에는 6단의 꽃구름대로 가득 채웠다. 꽃구름은 하단이 크고 상단으로 갈수록 작아진다. 후면은 4단의 꽃구름대로 가득 채웠으나, 중앙 상단 좌우에 용신을 표현하였다. 용신에는 용린이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비의 제원은 높이 2,5m, 폭 1,15m, 두께 0,3m이다.
[금석문]
비문은 당시 경연검토관겸춘추관기사관이던 최창대(崔昌大)가 찬술하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 이진휴가 쓴 것이다.
비의 상단에는 횡서의 전서체로 '靈鷲山興國寺重修事蹟'라는 비제가 음각되었다. 비신의 좌측에는 '有明朝鮮全羅道順天靈鷲山興國寺重修事蹟碑銘幷序'라는 비명이 종서로 음각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보조국사가 정(定)과 혜(慧)를 닦을 가람터를 찾던 중, 전라남도 광양시의 금오도에 갔다가 한 노승려의 지시로 비보사찰인 흥국사를 영축산에 창건했다는 내용이다. 법수대사와 계특대사, 승려 통일이 흥국사를 중건하고 발전시킨 과정을 정리하고 있다.
구체적인 금석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孔子曰吾道一以貫之又曰君子多乎哉不多也欲 學聖人□眠聖人之言遵聖人之道勉焉日有孶孶 從事於斯而已今之爲孔子去其多方也高者乃廣 述前言以爲博崇飾民爲名而於□所稱孔子之 言蓋或闕如也其下者得一鄕先生竊竊然私尊之 喧□祝之議馳驚於俎豆之事至爲逃賊後之淵 藪鳴呼可哀也□觀於爲佛者無然夫佛之爲道無 心也無爲也今剃髮披緇者徒能□□偈修建寺 刹而自比於無量功德曾不知無心無爲之爲何道 其於佛無遠矣余嘗深病乎此不肯爲儒宮僧舍作 文字頭流僧性能..而謁余請記興國寺重修之事 累辭累請十返益勤因曰能之固煩於執事者往以 慕公之文也公卒不許此事便巳余曰吾非有愛於 也因告之所深病者能曰善哉然講說經偈修建寺 刹無我佛之粗者雖於粗者無盡吾心況其精者尤 何敢不勉於所謂無心無爲□敢擬議若歸依區果 精進於初支能也固已跨心焉特公有□耳抑何拒 吾之深也又曰靈鷲之山雄峻特拔橫跨湖嶺之交 環山而建舍以十數興國寺爲最大寺卽普照國師 所創也經始於至區癸未于今四百季矣國師法名 知訥早悟眞乘廣行法施嘗入中國皇帝師之賜號 普照廣化定慧妙圓大師賜紫錦捲裟及還東土帝 令第三子後之因爲高呈法名湛堂無衣子興國師同 修願力旣創曹溪之松廣繼又營建此寺灣入中國 纂集諸禪所撰頌偈梓行東土今禪家所傳偈頌卽此 也皇明嘉靖庚申僧法守增營千有餘架居多且 千指軀像儼偉器寶精深佛事甚佈爲諸寺寇至壬 辰倭寇之難一掃爲塵泥煨燼毋論比丘輩咨嗟涕 휫卽東西者助之悲焉天甲子僧戒特積功重建象 觀政目論者猶恨法堂之卑隘而曆數十年竟莫能 新者我聖上二十六年庚午寺僧通日廣募檀緣 增拓基改構法堂三十餘架然後吾寺之壯傑煒燁 一灣舊觀海陸舊泯莫不仰膽無將使一切衆生觀 盛麗而生悅目莊嚴而起悟也此又可以無識也余 日唯雄無衣普照之蹟戒特通日之勞苦呈以記之 奚必吾言惟汝能自勉以第一義因粗以求精言下 承當不肯退轉呈以起余者其視造數層浮圖修一 座伽藍而侈然自以爲能者無有閑矣嗟夫吾黨之 士冠章甫衣逢掖尊誦孔氏而昧本迷原滔滔不知 返者獨能無愧於心乎揚子雲稱傍孔子之培而□ 鄭衛之聲則摩之斯無憤□之言也余於是重爲一 歡且吾嘗試問乎法□普照之爲上乘禪名流至今 其果在乎創松廣修興國而是耶否耶遂爲一轉語 以系之曰如是我聞請佛子說一念之惡爲惡爲 一念之善爲仙爲佛萬柱浮空于我何物片心寂照 千界遍徹寮閣天開鍾鈴韻發點一炷燈對千江月 無衣普照與我爲一□ 中訓大夫行弘文館修撰官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崔昌大撰 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李震休書倂篆 崇禎甲申溪後十年癸未六月日立
〈뒷면〉
世之祇佛者多矣以其非吾徒而祇之亦是也然自 漢明以表己蔓延於中國而天下尊崇之者殆半焉 各自道其道而己於吾何干焉必欲專攻之斯亦害也 今昇平興國寺釋慧日碩哲袖卷帖而來示余索余 言跋其重建建功之始不彈其誠而懇之試取本寺 事蹟而考之宋慶元間國師普照華基干此師異人其 脫胎之始化身之終俱載於曹溪松廣寺記蹟余嘗覽 此而知其得道也此寺曾經國師之占等而一自兵 亂以後昔之宏傑壯麗者蕩殘無餘式至天啓甲子 歲釋戒特者尸事重建悉復舊制而獨其萬敬之厥 低而隘不便供養居於寺者常愍之歲庚午釋道日 繼戒特之業因其舊址拓而廣之遂大構焉其奇規 密視昔尤有光焉今慧日碩哲遂爲金石之計廣求 施舍其勸福之文有可異者五曰誄石自墜終臭載 曰獰風暫定送□ 無□ 曰童顔志□八夢漁夫曰黑 夜如□神石榮明曰雪衣松被□傍塔石斯五事若 信也皆異也得非國師之靈猶至今未久而效其令 異於四百七十餘年之久耶鳴呼廢與成毁自有慶 易之理成而毁毁以成以至于今則安知後之成毁 無有如前之成毁而自今千百歲之後復有戒特道 日之志者繼武而出則寺將歷千萬劫而不朽而普 照之靈與之長照而不熄矣其重建之者亦與之流 名而慧日碩哲亦竝囑焉 通訓大夫前行江原道都事兼春秋館記注官鄭動虎跋文世郁書□ □ □ 金德恒施主秩通政池善億同知鄭愛重通政洪 贊立通政崔三峯通政白千益通政姜孝日通 政崔廷老通政之成通政趙永哲□□許弼亢 □□□振溟□□□後昌同知鄭哲通政洪信 尹氏□□□洪仁發□□□洪繼漢車氏月任判官洪 時漢察訪洪致碩水軍節度使李暉老德尙學通 政淸輝同知金得善通政崔命彖察訪白以淸別 將孫善黃一玄金時暉金太仁朴仁信梁承彖 金戒一金日玄金古邑上趙相弼崔□万崔戒 □李忠吉崔碩民白己玄諸夢良白萬金春立 同知金礪老德哲沈朱時萬吳延說金任金高 哲信通政玉仁同知海□通政惟洪通政覺還 通政付全通政法澄通政通下通政惟悅通政贊 敏通政玉楚判事□敏判事幸文判事窮眼判事 幸札判事雷軒判事智善俊甘判事贊見老德 淸甘判事雷照判事自文泣玉老德哲淑判事 敏全判事敏哲窮□神甘敏天順宋處還尙學 淳湜□全敏善決涅宮卓□□ 敏贊瑩還法理 竺敬月戒淳贊呂軒碩一德仁天克大雄密今 雪天羅屹覺林老德明眼判事贊允判事月允 老德克玄老德付學判事弘哲同知敏悟敏熙 允贊大亢世特贊仁大禪師印成大禪師敏機 大德奇卓通政住持慈彦始事住持碩浮三綱秩 特寺俊敏首僧弘見三寶順贊書記德均石工張 一季張島只千幸民姜朴萬哲林刻字片手時 衍安弼廷崔俊昌瑩休冶匠金有善窮敏碩哲 慧日都監覺察邊將時贊□□"
[현황]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이나 사업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이다.
흥국사중수사적비(靈鷲山興國寺重修事蹟碑)는 숙종 29년(1703년) 성능대선사(性能大禪師)가 건립한 비로 귀부, 비신, 이수가 비교적 완전하게 유존되어 있다.
비신은 중앙에 균열이 있고 하단에는 박락이 진행되어 현재 철재로 이를 보강하였다. 2011년 12월 20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2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비의 앞면에는 보조국사가 지정 계미년(1343년)에 흥국사를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뒷면에는 본사의 사적을 고찰해 보면 송나라 경원년간(1195년~1200년)에 국사가 터를 닦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혼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앞면에 기록된 지정 계미년인 1343년의 창건설은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보조국사는 1158년에 출생하여 1210년에 입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뒷면의 송나라 경원년간의 창건설이 신빙성이 있다. 이 창건설은 1691년에 간행된 『흥국사사적』에서 1196년의 창건설을 주장하므로 경원년간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흥국사사적』에서 제기된 1196년의 창건설은 송광사에 있는 보조국사비의 비문에 의하면, 당시 보조국사는 팔공산 거조암에 머물던 시기이다.
흥국사 창건 이래 당우의 중수 및 역사적 변천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흥국사 사적기』와 더불어 흥국사의 초기 역사와 승군의 활약상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