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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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瀏 |
영어음역 | Gim Ryu |
이칭/별칭 | 귤은(橘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준옥 |
성격 | 문장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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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 |
성별 | 남 |
생년 | 1814년 |
몰년 | 1884년 |
본관 | 경주(慶州)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문장가.
[개설]
거문도(巨文島)는 김류와 같은 대문장가가 태어난 고장이라 하여 클 거(巨), 글월 문(文)으로 섬 이름을 삼았다고 전한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귤은(橘隱). 김류의 집안이 거문도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은 7대조 김호은(金湖隱)이 난세를 피하여 거문도의 동도 지역에 입도하고서부터이다. 할아버지는 김정택(金鼎宅), 아버지는 김지관(金志瓘)[1796~1873]이다.
[활동사항]
김류는 거문도 유촌 귤동에서 1814년(순조 14)에 태어났으며, 장대한 체격을 갖춘 김류는 조부모와 부모가 모두 문장에 능숙하고 자손에 대한 가르침이 분명했던 탓으로 일찍부터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거문도의 서도(西島)에 살던 만회(晩悔) 김양록(金陽錄)[1806~1885]과 장흥(長興)의 남파(南坡) 이희석(李僖錫), 추려(秋旅) 김대원(金大源)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학문이 어느 정도 이르렀다고 판단한 김류는 과거에 합격하기는 티끌 줍는 것과 같다고 쉽게 생각하고는 서울로 향했으나, 그 결심은 이내 바뀌고 말았다. 장성에 이르렀을 때 성리철학(性理哲學)의 대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을 떠올리게 되고, 서른 나이에 노사(蘆沙)의 문하로 들어 전법(典法)과 예의의 강령을 터득하고, 사물의 본말을 종합하여 밝히며, 문장의 중심을 배웠다. 스승 기정진의 질정을 받으며 수학한 끝에 학문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게 되자 김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854년(철종 5) 러시아의 뿌찌아찐(E.V.Putiatin)[1803~1883] 해군 중장이 이끈 함대가 거문도를 무단으로 침범한 거문도 점령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류는 조선과 통상교섭을 원한다는 러시아 측의 뜻을 단호히 거절해 버렸다. 김류의 문집에 포함된 「해상기문」은 조선과 서양이 최초로 맺은 외교문서로 평가되기도 한다.
일찍이 성리철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칠 정도로 학문이 높았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남해 절해의 고도인 거문도 지역에서 낙영재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했다. 김류는 궁벽한 도서의 문물을 고치고 벽촌을 변화시킨 문인, 애향 운동가, 교육자 등으로 삶을 살았다. 1884년(고종 21) 4월에 우환으로 완도 땅 청산도에서 별세하였다.
[학문과 사상]
김류의 사상은 철저하게 주리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문장은 자기 성찰과 남해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관조, 그리고 모순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집약되고 있다.
[저술 및 작품]
김류의 격물(格物) 궁리(窮理)의 학문과 사상은 310여 편의 시편으로 『귤은재문집』에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거문도 유촌마을 뒤 산록에 김류의 위패를 봉안한 귤은당이 있다. 1904년 박규석 등 김류의 제자들이 세웠으며, 현판은 노사 기정진의 후예 기우몽이 썼고, 귤은당의 기문은 사신이 되어 일본으로 가던 중 풍랑으로 잠시 이곳에 머물렀던 이지용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