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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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末義兵運動 |
영어공식명칭 | The Righteous Army(uibyong) Movement in Modern Korean History |
이칭/별칭 | 의병전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894년부터 1909년까지 영주 지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민중의 자발적인 무력 항전.
[개설]
한말 의병운동은 1894년부터 1910년 경술국치 직전인 1909년 말까지 펼쳐졌는데, 그 특성에 따라 전기의병[1894~1896], 중기의병[1904~1907. 7.], 후기의병[1907. 8.~1909.]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의병]
전기의병은 1894년에 일어난 갑오의병과 1895년부터 일어난 을미의병을 모두 포괄하지만, 영주 지역 전기의병은 1896년 을미의병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895년 말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과 단발령 공포 소식이 전해지면서, 영주 지역 유생들도 하나둘씩 창의하기 시작되었다.
1896년 2월 6일 창의하였던 김우창(金禹昌)의 영천의진(榮川義陣), 1896년 3월 창의하였던 홍종선(洪鍾善)의 순흥의진(順興義陣), 1896년 3월 14일 창의하였던 김교명(金敎明)의 풍기의진(豊基義陣) 등이 모두 영주 지역에서 창의하였던 의병진이었다. 그 외 영주 출신의 신태운(申泰雲)·김휘정(金輝珽)·홍사구(洪思九)·장복규(張復圭)·이종보(李鍾輔)·이현구(李賢求)·신봉균(申鳳均) 등이 영주 지역에서 창의하거나 활동하였던 의병장이었다. 이들 의병부대와 의병장들은 안동의진(安東義陣)을 비롯한 경북 북부 지역의 각처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태봉전투(胎峯戰鬪)를 수행하는 등 불굴의 항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896년 9월 고종이 선유사를 파견하는 등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면서, 약 9개월 동안에 걸쳐 전개된 항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중기의병]
중기의병은 1904년부터 1907년 7월 말까지 영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강제로 체결된 제1차 한일협약으로 조선이 준 식민지 상태가 되자, 이에 맞서 영주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났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직 관료와 유생들이 의병에 대거 참여하였다. 영주 지역에서는 1905년 9월 단양의병(丹陽義兵)과 호좌의병(湖左義兵)이 들어와 활동하였다.
경북 북부 지역의 경우 1905년 7월 말 호좌의병이 남하하여 예천 지역으로 들어왔고, 영주 지역에는 9월 중순 단양의병이 풍기에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호좌의병과 단양의병은 충청도 단양 지역에서 활동하던 원용팔·정운경 등의 의병부대인데, 이들이 순흥과 영천에 진출하여 우체소를 습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1905년 10월 원주진위대의 한국군이 투입되어 의병을 진압하였고, 1905년 11월 6일에는 일본군이 영주에 들어왔다. 이때 일본 육군 헌병 대위와 육군 보병 소위가 인솔하는 42명이 의병 토벌을 목적으로 영주 지역에 한동안 진주하였다. 특히 영주 인근 소백산과 태백산 일대에는 충청도와 강원도 일원의 의병들이 들어와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후기의병]
후기의병은 일본이 정미7조약을 근거로 한국군을 해산하는 1907년 8월 1일부터 1909년까지 전개되었다. 후기의병은 고종 황제의 퇴위와 군대 해산이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을 비롯하여 유림·농민·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이 의병에 참가하면서, 전면적인 항일 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후기의병에서 활동한 영주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는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 실패 이후 경북 북부 지역의 소백산과 태백산을 거점으로 전면적인 대일항전을 벌인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이 있다. 그러나 이강년은 1908년 7월 청풍의 작성전투에서 체포되고 1908년 10월 순국하였다. 이후 이강년 휘하 장령들이 조직한 김상태 부대(金相泰部隊)·최성천 부대(崔聖天部隊)·김운선 부대(金雲仙部隊)·금달연 부대(琴達淵部隊) 등의 소규모 부대가 경북 북부 지역의 소백산과 태백산을 근거지로 삼아 1910년 나라가 망할 때까지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김상태 부대는 경북 북부 지역의 소백산 일원을 거점으로 영천·순흥·풍기 등지에서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의병부대였다. 강원도 삼척 출신의 김상태는 1908년 5월 이강년 부대의 봉화 서벽전투(西碧戰鬪)와 내성전투(乃城戰鬪), 안동 재산전투(才山戰鬪)를 치르는 과정에서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이강년이 체포되어 순국한 뒤에는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1910년 일본군의 소위 ‘토벌작전’을 피해 가며 각처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 휘하에는 정경태·최성천·윤국범 등이 거느린 소규모 의병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1년 6월 14일 순흥의 연화동[지금의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에서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단식투쟁으로 항거하다가 옥사하였다.
최성천 부대는 처음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910년부터 순흥·영천 지역으로 들어와 김상태와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강원도 영월 출신 최성천은 김상태의 지휘를 받으며 안동·영천·예천·용궁 등지에서 소규모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활동하였으며, 그 휘하에 부장 윤국범과 차장 권승익을 거느리고 있었다. 최성천을 각처를 전전하며 유격전을 감행하였고, 1910년 7월에는 안동 천전의 사립 협동학교를 습격하기도 했다.
김운선 부대는 1902년 2월경 강원도에서 순흥으로 들어와 활동하였다. 강원도 원주 출신의 의병장으로 호좌대진소(湖左大陣所)라는 소규모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휘하에 의병장 원서방(元書房)과 연합하여 순흥 일대에서 유격전을 통해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금달연 부대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영주에서 김낙임(金落任)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순흥 출신 금달연은 1907년경 이강년 부대의 중군장 김상태와 연결하여 대일항전을 벌이다가, 1907년 음력 9월경 이강년 부대에 합류하였다. 이강년이 체포되어 순국한 이후 김상태와 함께 남은 의병을 수습하여 영주와 단양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9년 7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1914년 10월 옥사하였다.
그 외 중·후기 이강년 부대와 그 휘하의 김상태·최성천·김운선 등이 거느린 의병부대에서 활동한 영주 출신 인사로는 손기영(孫基永)[장수], 서재승(徐在承)[순흥], 김재명(金載明)[장수], 권석규(權錫奎)[순흥], 김선이(金仙伊)[순흥], 이교영(李敎永)[영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