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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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仙伊 |
영어공식명칭 | Kim Seon-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 김선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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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김선이 김상태 의진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김선이 투옥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김선이 징역 5년 선고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김선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김선이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 |
거주|이주지 | 김선이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 |
활동지 | 김선이 활동지 - 소백산 일원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정의]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개설]
김선이(金仙伊)[1878~?]는 1909년 5월부터 9월경까지 김상태(金尙台)[1864~1912] 의진에 가담하여 수십 명의 병사와 함께 경상북도 영천군(榮川郡)과 봉화군, 강원도 영월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김선이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 덕거촌(德巨村)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김선이는 1909년 김상태 의진에서 활동하였다. 김상태는 충청도 영춘 출신인데, 1896년 전기의병 때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진과 유인석(柳麟錫)[1842~1915] 의진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상태는 충청북도 제천에서 재기하였다가, 1907년 이강년 의진에 합세하였다. 그러다 1908년 7월 이강년이 청풍 작성전투(鵲城戰鬪)에서 체포되자, 이강년의 지휘권을 인계받아 독자적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이끌었다. 김상태는 1909년 3월 충청북도 단양군의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김선이는 1909년 5월 25일 무렵부터 김상태 의진에 참여하여 동료 수십 명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였고, 김상태의 지휘를 받아 활동하였다. 1909년 7월경부터 경상북도 봉화·영천, 강원도 영월 일대의 소백산 지역을 중심으로 소규모 부대의 유격전을 펼쳤다.
1909년 9월 일본군은 소백산 일대의 의병들을 토벌하기 위해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선이는 김상태·정경태(鄭敬泰)·최성천(崔聖天)[?~1910]·윤국범(尹國範)[1882~1911] 등과 함께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의병활동을 지속하였으나,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김선이는 1909년 10월 13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김선이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