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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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書院 |
영어음역 | seowon |
영어의미역 | Private Confucian Academy |
이칭/별칭 | 서재,원우,사액서원,붕당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찬용 |
[정의]
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세운 사학 위주의 학문 기관.
[개설]
서원은 최초 중국 당나라 궁중에 설치된 집현전 서원(서재)을 모태로 한 사학(私學)으로 출발한 학문연구 집단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기부터 국가의 학문 중추기관으로 운영되면서부터는, 관학기관(성균관, 향교)의 부진과 학문적 고착화를 극복하는 향촌 교육기관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전국에서 안동 다음으로 서원이 많았던 남원 지역에서도 사회적인 유학 숭배 경향과 함께 많은 선비들이 서원에 가입하여 사립 중등교육기관으로서 활약하였다. 남원 지역의 서원에서는 남원 출신이거나 남원과 관련된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선비[名賢]를 추모 배향하면서 학문을 수양하였다. 또한 향촌사회의 공동체 실현과 지역 선비들의 입신양명을 목표로 한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명칭유래]
서원의 명칭은 중국 당나라 때의 서적을 편찬하고 보관하던 서재(書齋)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시 당나라 궁중에서 운영된 ‘집현전 서원’이 서재의 개념이 포함된 최초의 서원이었다.
향토 사료 연구와 서적 출판의 기능 외에도 선현을 받들어 모시면서 세력을 이루고 학문을 연마하는 실질적인 형태의 서원은 송나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조선시대에 전해졌다.
조선 중기에는 서원제도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정착과정을 겪으면서 전국 각지의 서원이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남원 지역에서도 이러한 사회적 흐름과 현상에 따라 급속하게 서원이 구성되면서, 향촌사회의 선비 문화가 확산되었다. 또한 관내 행정구역인 각급 방에서도 많은 향촌 선비들이 서원 건립의 필요성과 향촌의 중등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전라관찰부에 가장 많은 서원이 구성되어 활약하였다. 이후로 남원 향촌사회는 사대부 양반과 선비사회의 활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등 지역 문화 활성화의 계기로 작용하면서 남원 사회에 중인 계층의 지식인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과거에 합격한 선비들이 500여 명 배출되었을 정도로 지역 교육사업에 있어서 서원의 역할은 절대적이었고, 지방 교육의 중심지로서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 이러한 서원의 활성화는 전국적으로도 사학의 서재와 강학당 시설이 갖추어지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전국적인 현상에 따라 선비관료가 무신을 통제하는 문치사회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조정에서 예산·인력·재산 등을 하사하여 지원하는 사액서원이 남원 지역에서도 창주서원·노봉서원 두 곳이나 있었다.
[설립]
조선시대 서원은 중국의 서원제도를 도입한 형태로 출발하였다. 한국 최초의 서원이 생긴 것은 조선시대인 1542년(중종 37)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설립한 백운동서원이었다.
당시 백운동서원은 중국 남송의 학자인 주희(朱熹)[1130~1200]의 성리학(주자학)을 소개한 안향 선생의 옛 집터에 사당을 짓고, 안향을 제사하면서 주변 지역의 향촌 자제들을 교육하는 형식이었다.
서원의 주된 설립 취지는 향촌사회의 붕당화와 지속가능한 공공 학습공간의 기반을 만드는 데 있었다. 따라서 본격적인 서원의 성장은, 16세기를 전후로 관학의 성과가 부진하여 향촌 교육을 조성해야 한다는 중앙정부의 교육정책에 따라 관학과 사학의 두 축을 중심으로 하는 사림(士林)이 형성되면서부터이다.
이러한 정책의 추진으로 인해 지방사학이 형성되었고, 서원은 급격하게 향촌사회의 지식인 집단세력을 중심으로 연계되었다. 그리하여 향촌세력의 붕당 근거지이자 중앙의 훈구세력과 쌍벽을 이루는 사림세력의 전초기지로 변해갔다.
특히 조선 명종 이후 서원의 설립이 전국 각지로 확대되면서 남원 지역의 향촌사회 역시 서원이 깊이 뿌리내렸고, 붕당화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조선의 명현인 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 등으로 이어지는 신진사류가 15세기 후반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 수도권 등을 비롯한 중앙세력 훈구파와 대결 양상이 전개되었다.
또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극한 대결이 집단적 암투과정으로 표출되어 결국에는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심각한 사회적 혼란을 겪게 되었고 그에 따라 사림이 위축되고, 지방사림의 근거지인 서원에 은거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서원이 더욱 확대되고 향촌선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는 근본적인 서원의 강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남원 향촌사회에서도 서원 창건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서원의 창건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었던 남원양씨 일가의 용장서원(1402년 중건)을 시작으로, 조선 중기에는 고룡서원(1579년 창건, 지금의 창주서원의 전신)과 삭녕최씨 일가의 노봉서원(1612년 창건), 영천서원(1619년 창건)으로 이어졌다.
이어 요계서원(1694), 노봉서원(1649), 두곡서원(1766), 신포서원(주포서원 이름으로 정조대왕시절 창건)이 계속 창건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유천서원(1830)과 풍계서원(1788), 호암서원(1789), 방산서원(1702), 용호서원, 유천서원(1830) 등이 남원의 중등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시설구조]
서원의 기본 건축양식과 시설구조는 크게 교육 시설과 제향 시설, 두 분야로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원의 건립 장소는 풍수지리에 따라 건립지로서 특히 전경이 좋은 산비탈이나 마을 뒤 구릉지대 등의 터가 가장 인기를 끌었다.
현재 남원 지역에 남아 있는 몇몇 서원의 위치 역시 주로 산비탈과 구릉지대에 건립한 서원들만이 잔존해 있다. 일차적으로 서원의 건축양식과 배치구조는 교육 시설로서의 제실과 강당, 그리고 제향 시설인 사당으로 나뉜다.
배치 형태는 앞쪽에 교육시설을, 뒤쪽에 제향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각 건물은 일정한 중심축을 따라 앞에서부터 정문·누각·강당·내삼문·사당 순으로 배치되었다.
강당 전면에는 좌우 대칭으로 재실을 두었다. 그리고 제기고·장판고·교직사 등은 서원 건물 주변에 적절히 배치하였다. 물론 특이한 경우 건축양식에 변화를 줄 수도 있었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림세력의 근거지와 붕당의 역할뿐만 아니라, 은거하면서 학업을 익히고자 하는 본래의 취지도 있었기 때문에 건축양식에서도 특별한 꾸밈 없이 주변의 자연과 잘 어울리는 것을 특색으로 삼았다.
이는 현재 남원시 도통동의 창주서원과 덕과면 만동마을 앞쪽의 호암서원, 금지면에 조성된 환봉서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들은 자연환경을 시설 건립에 중요하게 적용하려는 지역 선비들만의 검소한 생활환경과 삶의 가치관이 잘 반영된, 전형적인 유교 건축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서원의 건물 구성에는 활동 가능한 선비들의 현황, 서원을 지원하고 운영하는 주체, 서원의 격, 서원의 활동반경에 따라 차이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 후기로 가면서 서원의 기능이 조금씩 바뀌면서 건물의 크기나 구조도 바뀌어갔다. 17세기 후반까지는 제향시설 중심으로 건물이 조영되었고, 19세기에 와서는 대체로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로 바뀐 것이다.
[역할]
남원 지역의 서원은 조선시대 중기에 많이 창건되었다. 운영방법 역시 조선 관학의 성립과 그에 따른 보완책을 위해 중국식 서원제도를 모방했다. 숭유억불 정책의 일환으로 국가에서도 서원 건립을 지원하고 장려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남원도호부는 전라도 전체에서 3대 도시에 속했기 때문에 향촌선비들은 이러한 국가 정책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또한 관학의 활동이 미비한 탓에 향후 지역의 교육은 서원에서 이루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지방 행정기관에서도 많은 서원이 건립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띠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거의 2~3개 방마다 하나씩 서원이 있었던 남원의 서원 현황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의 향촌사회를 대표하는 남원의 서원이 향촌학문의 대중화를 만들어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남원에 서원들이 건립된 이후 그 역할은 남원도호부에서 매우 지대했다. 첫째 국가적인 유교 및 유학인 주자학의 보급을 중요시하여, 유학의 학문적 연구와 지역적 대중화에 주력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이는 향촌사회의 유학의 숭상열기와 학문을 숭상하는 민족 고유의 지향점이 일치하였음을 의미한다.
둘째는 남원 지역 14개 성씨를 대변하는 여러 문중의 결속과 향촌 사림의 확대를 위해 서원에서 선현 봉사가 필요하였다. 사묘 및 의례가 거행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에 따른 중요한 역할을 서원이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17세기 이후의 서원은 사묘 제향 위주의 성향이 현저해졌다. 향촌사회 역시 사우(祠宇)가 가문의 권위를 나타내는 데 큰 역할을 함으로써, 다투어 서원과 문중사우를 만들게 되었다.
셋째로는 향촌사회의 중등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 확대를 위해 전개한 도서관으로서의 역할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서원이 일차적으로 배움의 장이라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배움의 필수 조건으로 예나 지금이나 책을 빼놓을 수 없다.
원래 교육기관의 고유 업무는 교육과 연구를 원활히 하기 위해 향토사료를 비롯한 많은 책과 자료를 구비하고 활용하는 것이었기에, 서원이 이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서원에 도서관과 같은 문고를 두어 여러 가지 서적을 수집·보관했고, 나아가서는 연구성과와 선현들의 사상을 보급하기 위해 서적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는 서원의 본래 목적과 기능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서원이란 용어 자체도 도서관적 기능에서 비롯되었다.
[서원과 향촌사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남원 지역의 향촌에서는 16세기 초에 발생한 사화로 인해 학문을 해오던 사림 세력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을 보면서, 인적·물적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 많은 노력을 했다.
이에 따라 서원에 나오지 않고, 서원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위축시켰으며, 선비들의 왕래도 일부러 끊어 명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에서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견제와 모함으로 능력 있는 선비들이 목숨을 잃었다.
겨우 죽음을 면한 유생들은 변방 오지로 귀양을 가거나 현실 정치에서 나와 낙향 혹은 은거하며 학문에만 매진하며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림학자인 서경덕·이언적·이황·조식·김인후·기대승·성훈·이이 등 명망이 높았던 선비들이 그러한 경우였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다행인 것은 남원 사림세력 중에서도 중앙의 훈구파 모함에 쫓겨 낙향하거나 은거한 선비들이 지역의 젊은 유생들로부터 오히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남원 지역 서원의 확대와 향촌 교육활동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다.
일부 향촌 유생들은 스스로 배움을 실현하고자 거리를 따지지 않고 전국의 향촌 서원에 은거하고 있던 명현(名賢)들을 직접 찾아가 배움을 청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초·중등교육의 학문 연마를 같이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향촌사회의 교육 기반은 16세기 사화 이후 남원을 비롯한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향촌의 유생과 명망 있는 석학들이 연결되면서 서원은 체계적인 교육 시설로 다시 안정을 찾았고, 사림도 정계에 많은 진출을 하게 되었다.
[교육]
일반적으로 서원에서의 교육 방향과 방식은 국가교육기관이었던 향교(관학)의 부진에 따른 대안 제시에서 비롯되었다. 또 한국적인 주자학의 학문적 범위의 확대, 향촌 도서관의 다양한 교재 선택에 따른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
이는 전국 곳곳의 향촌사회 분위기가 모두 제각각인 문화적 다양성에서 출발한 결과였다. 남원에서도 서원의 사상에 봉안하고 또 배향하는 명현들이 모두 향촌사회에서 존중되었기 때문에 서원만의 학문공동체 형성과 세력화가 가능해졌다.
이는 중앙정치권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에서도 중국의 주자학(성리학) 숭배 열기가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남원에서도 향교나 성균관 같은 관학 위주의 경직화된 학문에서 벗어나 토착화 교육을 지향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하며 문화예술의 교육 방식도 새롭게 실행되었다.
결국 서원 본연의 교육방식은 사서삼경과 주역 등을 근간으로 한 사물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실천 덕목, 유교숭상 의례를 체계적으로 익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향촌사회라는 무대가 가장 중요한 지향점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서원의 주요 구성원들은 대개 지방 관찰부나 한양의 중앙정계에 진출하려는 뜻을 품은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도 중앙정계에서 쫓겨 낙향한 선비들도 많았기에, 서원은 그들의 재기 장소로 활용되었고, 붕당의 후방기지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정치적이면서도 학문지향적인 성격이 강한 서원이, 조선 후기로 가면서 이름난 명현 중심의 붕당화와 세력규합에만 주력하면서 본래의 취지가 점점 퇴색되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배향하는 선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기능이 변질되었고, 서원 건립에도 재력 있는 문중 인물이 제향되어 교육의 기능보다는 사묘의 기능이 더 커졌다.
그리하여 결국 서원은 단순한 문중 사당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로 확대되었고, 문중 중심의 부조리한 운영으로 폐단이 나타나면서 전국적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어갔다. 남원 지역의 서원도 다른 지역의 서원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통한 대규모 구조조정에 휘말리게 되었다.
[남원의 서원]
서원의 전국적인 확장은 조선시대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추진되었다. 특히 경상도의 안동, 전라도의 남원, 충청도의 청주를 비롯하여 상주·대구·진주·나주 순으로 서원의 수가 많았다.
서원은 조선 중기 명종 때에 29개, 선종 때 124개로 크게 확대되었고, 숙종 때에는 전국적으로 약 890개의 서원이 존재할 정도로 급속히 팽창함으로써 국가적인 문제로까지 부상했다.
당시 전라북도 내에 있었던 서원도 60여 개나 되었으며 남원 역시 수십 개의 서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추세와 같이 지속적으로 명맥을 유지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남원도호부 관할 구역 내의 48방 지역에 서원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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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남원도호부 관내 서원
[폐단]
서원 설립 초기에는 남원 지역에서도 서원의 긍정적 기능과 중요성을 인지한 덕분에 인재를 키우고, 선현·향현을 제사 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시정하는 등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를 거쳐 후기로 진행될수록 서원 내부의 혈연·지연 관계가 폐쇄적으로 형성되고, 개별 서원 내에서도 학벌·당파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화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 즈음에 전국적으로도 서원에 대한 비판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사액서원의 경우에는 서원에 부속된 토지가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되기 때문에 양민의 투탁을 유인하여 서원을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서원은 양민이 서원노비가 되거나 군역을 기피하는 곳으로 변질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군정이 부족하게 되고, 불량 유생의 협잡소굴이 되는가 하면, 서원세력을 배경으로 수령을 좌우하는 등 문제가 많았다.
또한 면세의 특권을 남용한 서원전(書院田)의 증가로 국고 수입이 감소되었고, 서원의 유생은 관학인 향교를 외면했으며, 이른바 서원에 들어가 붕당에 가담하여 당쟁에 빠져드는 일이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서원의 폐단에 대한 논란은 인조 이후 꾸준히 있었으나, 특권 계급의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쉽게 폐쇄하지 못하고 문제만 점점 심화되어갔다. 1657년(효종 8) 선비 서필원의 경우에는 상소 중에 서원의 폐단을 논하다가 오히려 파직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세기 중반인 1738년(영조 14)에 안동 김상헌의 원향이 철폐된 것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서원 정비정책이 단행되어, 전국의 서원 200여 개소가 철폐되었다.
구한말 국내의 부정부패와 외국세력에 대한 쇄국정책의 공고화를 위해 1864년(고종 1) 집권한 대원군은 수세기 동안 누려온 서원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했다. 그리고 다음 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폐쇄하고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가 될 만한 47개소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의의와 평가]
남원 지역의 서원은 조선시대 남원도호부 행정구역에 있던 남원향교·운봉향교와 더불어 남원지역의 교육을 책임지는 양대 중등교육기관의 하나였다. 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인데, 함안에 있는 주세붕의 묘비에는 “양반이나 천민이나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원은 남원에서도 이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임진왜란 시절 남원 인구 총 6,000명)에게 가장 중요한 배움의 장소요, 기회의 학습기관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향촌사회에서의 서원이라는 존재는 조선 중기에 등장한 사림계가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 이후 전개된 붕당정치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지역민에게는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자신의 자제를 입신양명시키기 위한 신분상승의 희망으로 여겨졌다. 또한 남원의 서원은 중앙의 정치문제에 대한 향촌사림의 일차적 여론결집 거점이 되면서 점차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이는 향촌사회에서 사족의 활동 기반이었던 유향소와 향교·향약 등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붕당정치가 명분과 의리 중심으로 전개됨으로써, 향촌의 공론 정치 운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원은 교육과 제향 기능이 중심이었고, 양반들이 모여 여러 문제를 의논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공공장소로도 기능하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서원의 폐단이 드러나면서 남원 지역의 서원 역시 역기능이 드러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붕당정치의 배후 기지로서의 역할보다는 문중 중심의 폐쇄된 구조를 띠었다. 사색당파의 각 본거지로 변모하면서 초기의 순수하고 긍정적인 향촌 교육의 역할은 퇴색했고, 학문 연구 및 심신 도야라는 원래 목적도 심각하게 훼손당하였다.
같은 시기 전국의 각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향촌세력을 공고히 하고 사림에 의한 향촌 지배도구로 이용되어, 일반 백성들에게는 국가 외의 또 다른 권력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결국 남원의 서원도 대원군이 집정하는 19세기에 이르러 철폐령을 맞았고, 대다수의 서원이 폐쇄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일부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운영 주체의 노력 등으로 시설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주서원·호암서원·용장서원·환봉서원 등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