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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734
한자 南原城戰鬪
영어음역 Namwonseong Jeontu
영어의미역 Battle of Namwon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유재란
발생(시작)연도/일시 1597년 8월 1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597년 8월 16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북도 남원성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양원

[정의]

1597년 정유재란 중에 전라북도 남원성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왜군과 싸운 전투.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에 이어 왜군이 재차 침략한 정유재란으로 인해 조선은 다시 한번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조선에서는 정유재란에서 일본의 침략 목표 지역을 전라도와 충청도라고 여겨, 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최전방의 보루로서 남원성을 지목하였다.

남원성은 조선의 조정에서는 물론 명나라에서까지 중요성을 강조할 정도였다. 남원은 지리적으로 경상도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충청도와 경기도의 외번(外藩)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조선에서는 정유재란시 가장 먼저 조선에 왔던 명군을 남원에 배치할 정도였다.

[경과]

왜군이 전라도 구례를 점령하고 남원으로 북상하고 있을 때, 남원에는 명(明)의 부총병 양원(楊元)이 3,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다. 양원은 왜군이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에게 조선군의 증원을 요청하여 관군 1,000명을 받아 4,000여 명의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일본군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거느린 5만 6,000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이들은 8월 13일 남원 교외에 진영을 설치하고, 성 외곽을 포위한 후 조총사격을 가해왔다.

이에 조·명 연합군은 승자총통과 비격진천뢰 등을 발사하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그러자 왜군은 14일부터 공성 기구를 새로 제작하고, 참호를 메꾸는 등 본격적인 공격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때 양원은 전주에 주둔하고 있던 유격장 진우충에게 두 차례나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진우충은 전주성을 비울 수 없다는 핑계로 증원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양원은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왜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16일 왜군은 본격적으로 총공격을 퍼부었다. 높은 누각을 만들어 그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조총 사격을 가하는 한편,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 올라왔다. 연합군은 이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이 날 밤 왜군은 서문과 남문을 돌파하여 성 안으로 들어왔다.

북문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이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있었으나, 이들도 배후 공격을 받아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병사 이복남 이하 3,000여 명의 장병들은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장렬히 전사하였다.

명의 장수 양원은 50여 기를 이끌고 탈출하였다. 한편 전주성의 진우충은 남원에 구원병을 보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남원성의 함락 소식을 듣자 성을 버리고 달아나 일본군은 남원을 거쳐 전주를 무혈로 점령하였다.

[결과]

남원성 전투는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성을 지키다가 실패한 대표적 전투이다. 많은 수의 조선군이 전사한 전투였을 뿐 아니라 명군의 피해 또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에 가장 컸다. 남원성 전투의 패배로 인해 호남과 충청 지방의 일부는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서울까지 민심이 동요하기에 이르렀다.

[의의와 평가]

정유재란 중의 남원성 패배를 계기로 문란했던 조선 사회는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기구의 부패를 낳게 되었다. 결국 남원성 전투의 패배는 남원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사회 전체가 왜군에 의해 퇴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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