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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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奎喆 |
영어음역 | Gim Gyucheo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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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몰년 시기/일시 | 1929년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이명상 부대 중군장 |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장.
[활동 사항]
김규철(金奎喆)[1881~1929]은 궁내부 주사(主事)를 역임한 관료이었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청풍 지역에서 조동교(趙東敎)·신기영(申基永)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명상(李明相) 부대의 중군장을 맡은 적도 있다. 주로 단양과 금수산(錦繡山)을 근거지로 제천·청풍·단양·충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는데,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여하여 1907년(순종 1) 음력 9월 죽령 지역에서 400여 명을 인솔하고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다섯 차례의 전투를 승전으로 이끌었고, 철원 싸움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그해 11월 체포되었으나 탈주하였으며, 이듬해 봄에도 체포와 탈주를 거듭하였다. 여름에 청풍 작성 전투에서 이강년 의진이 흩어지자 잔여 세력을 규합하여 제천 지역을 중심으로 항쟁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김규철은 부하들이나 일본군이 ‘날아다니는 장수[飛將]’로 불렀을 만큼 신출귀몰한 기동력으로 전투 때마다 용맹을 떨쳤다고 한다.
1909년(순종 3) 전 승정원 승지 김규흥, 의병장 권용일(權用佾) 등과 함께 고종의 청병서(請兵書)를 청나라의 실권자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전하기 위해 배편을 구하던 중 인천에서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1910년 이범규(李範圭)·남장희(南壯熙) 등과 합세하여 의친왕(義親王)을 모시고 중국으로 망명하려고 하였으나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1922년에는 국내에서 모은 군자금을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전하기 위하여 출국하려다가 인천항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 일로 2년간 구류되었다가, 서울에서 재판을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