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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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用佾 |
영어음역 | Gwon Yongil |
이칭/별칭 | 경로(敬魯),청은(淸隱),정경로(鄭敬老)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출생 시기/일시 | 188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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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몰년 시기/일시 | 1971년 |
출생지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덕곡리 |
성격 | 의병|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로(敬魯), 호는 청은(淸隱).
[활동 사항]
권용일(權用佾)[1884~1971]은 제천시 한수면 덕곡리 딱밭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장으로 일하던 18세 때 청풍의 일본군 헌병 주재소에서 할당하는 마초(馬草)의 감면을 요구하다가 질책을 받자 헌병들을 구타하고 주재소에 불을 지른 뒤 도망쳤다. 이후 행상을 하다가 1907년(순종 1) 여름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李康秊)과 만나 의진에 몸을 던졌고, 천남 전투 이래 크고 작은 싸움에서 주로 우군장 이중봉(李重鳳)의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의병 봉기 당시 원주에서 얻어 배향산에 숨겨 둔 탄약을 의진에 성공적으로 공급하여, 의진이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12월 영춘 복상골 전투에서 패한 후, 이강년이 주력을 이끌고 북상할 때 동참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 백남규(白南奎) 등과 함께 이듬해 봄까지 소백산 일대에서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이강년이 다시 남하하자 병력을 합쳐 경상북도 북부 지역인 서벽·재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강년이 체포된 후 의병의 기세가 크게 꺾이자, 수배를 피하여 은둔하였다.
나중에 전 승정원 승지인 김규흥 및 이범구·김규철(金奎喆) 등과 함께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보내는 고종의 편지를 가지고 출국하다가 도중에 발각되어 동지들이 체포되자 이름을 정경로(鄭敬老)로 바꾸고 산삼 상인으로 가장하여 인천에서 소금 배를 타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이국땅에서 유랑 생활을 하다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조직되자 이에 가담하여, 7년간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만주 독립운동가 사이의 연락책을 맡았다. 후에 몰래 귀국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충주에 살고 있던 옛 동지 백남규와 왕래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정미왜란창의록(丁未倭亂倡義錄)』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