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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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林-世界的作曲家鄭律成 |
이칭/별칭 | 정부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유하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하였으며, 중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3대 작곡가 중 한 사람.
[개설]
정율성(鄭律成)은 중국 인민해방군 정식 군가인 「중국인민해방군 군가(中國人民解放軍軍歌)」와 「연안송(延安頌)」을 작곡하여 중국 혁명기에 문화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곡가이다.
[가계와 어린 시절]
1914년 음력 7월 7일 전라남도 광주군 부동방면 금정[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서 정해업(鄭海業)과 최영온(崔英溫) 사이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인데, 정해업은 막내에게 부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버지 정해업은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고, 어머니 최영온은 최흥종(崔興琮)과 최영욱(崔泳旭)의 동생으로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유명한 지식인 기독교 집안 출신이다. 최영온의 오빠 최흥종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 추방되었고, 3.1운동에 가담해 1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또한, 나환자(癩患者)를 위하여 여수 애양원, 나주 호혜원 등 나환자 정착촌을 건립해 나환자들을 돌보았다. 최흥종의 이복동생 최영욱은 숭일학교와 서울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을 졸업한 뒤,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제중원[지금의 광주기독병원]에서 근무하다 미군정 시대에는 초대 전라남도지사를 지냈다. 최영욱의 아내 김필례(金弼禮)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최영욱을 따라와 수피아학교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광주에서 최초로 오웬기념각에서 독창회[자선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최영욱과 김필례는 둘 사이에 아이가 없어 정율성을 양자로 삼고 싶어하였다.
정율성은 어린 시절 최흥종과 최영욱, 두 외삼촌이 귀히 여겨 큰외삼촌[최흥종] 집에 있는 축음기를 통해 나오는 서양 음악을 마음껏 듣고 피아노를 치며 놀았다고 한다. 숭일학교에서 소학교 과정을 마친 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립학교에서 일본식 교육을 받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전라남도 전주에 있는 사립 신흥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교사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어려워진 가정 환경으로 신흥중학교를 중퇴하고 광주에 있는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다.
정율성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는 이미 외삼촌과 형들이 독립운동을 하던 중이었다. 정율성의 큰형인 정효룡(鄭孝龍)은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전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둘째 형 정충룡(鄭忠龍)은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름을 정인제(鄭仁濟)로 바꾸고, 중국 운남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하여 국민혁명군 제24국 중좌 참모로 복무하였다. 정충룡은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애지중지하던 만돌린을 정율성에게 물려주었다. 셋째 형 정의은(鄭義恩)은 김원봉(金元鳳) 등이 중국에 창설한 의열단에 가입하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비밀 모집책이었다. 1933년 정의은이 간부학교 학생 모집 차 조선에 잠입하여 왔을 때 정율성과 누나 정봉은(鄭鳳恩)은 정의은을 따라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정율성의 중국 난징 시절]
정율성은 중국 난징에 도착하여 1933년 10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하여 이듬해 4월 20일에 졸업하였다. 난징에서 의열단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젊은 음악인 두시갑(杜矢甲)으로부터 크리노와(Krenowa) 교수를 소개받았다. 크리노와 교수는 상하이 예술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소련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의 성악가였다. 크리노와 교수의 배려로 레슨을 받게 된 정율성은 난징에서 상하이까지 1년 반 동안 매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크리노와 교수를 찾아가 성악과 음악이론을 공부하였다. 크리노와 교수는 정율성에게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대신 생화 한 묶음이면 족하다고 했다고 한다. 정율성의 노래 실력이 좋았던지 크리노와 교수는 이탈리아 유학을 추천하였다. 정율성은 이때 음악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이름을 '부은'에서 '율성'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정율성은 이탈리아 유학 대신 옌안[延安]을 선택하였다.
1920년대 후반, 중국 문예계에서는 커다란 문학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 속에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조직한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가 있었다. 오월문예사는 항일 구국 문예활동과 연극 공연을 통해 대중 교화를 목표로 삼고 있었고, 문예이론 학습, 혁명문학과 문화대중화론, 국방문학 등을 토론하였다. 정율성은 오월문예사에 가입하였고, 이 활동을 통해 중국 문예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6년 5월 오월문예사가 창립 대회를 하는 날, 추취도(鄒趣濤)의 시에 정율성이 곡을 붙여 「오월의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오월문예사의 사가로 인정받았다. 정율성은 오월문예사를 통해 당시 최고의 작곡가 선성해(先星海)를 만나게 되었다. 선성해는 베이징[北京] 예술전문학교와 국립 상하이 음악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음악원에서 정식으로 서양음악을 교육받고 온 사람으로 정율성이 동경하던 음악가였다. 선성해는 본인이 작곡한 「민족교향악」과 「구국군가」를 초견(初見)에 부르는 정율성의 노래를 듣고 음반 녹음을 정율성의 노래로 낼 것과 상하이에서 음악 공부를 할 것 등을 제의하자 정율성은 흔쾌히 동의하였다.
[정율성의 옌안행]
1937년 8월 일본이 대규모로 상하이를 공격하기 시작할 무렵, 즉 제2차 상하이사변이 일어나자 정율성은 난징을 떠나 선성해가 있는 상하이로 갔다. 하지만 선성해는 연극대와 함께 장쑤[江蘇], 저장[浙江], 허난[河南] 등지로 항전을 선전하러 떠나가고 없었다. 정율성은 누나 정봉은과 결혼한 매형 박건웅(朴健雄)의 소개로 알게 된 김성숙(金星淑)과 김성숙의 중국인 아내, 중국 공산당 당원이면서 상해여자부녀계구국회의 지도자인 두군혜(杜君慧)의 집에서 머물면서 두군혜의 권유로 대공전영희극독자회(大公電影戱劇讀者會) 제5대에 가입하여 일반시민들에게 항일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공연을 하고, 전선을 방문하여 병사들의 항전 의지를 북돋아주는 활동을 하였다.
중국과 일본 간의 전쟁이 더욱 심해져 상하이에 더 이상 머물기 어려워지자 정율성은 두군혜와 주변의 도움으로 소개장을 가지고 옌안으로 떠났다. 옌안에 도착한 정율성은 섬북공학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이 무렵 옌안의 청년들은 섭이(聶耳), 선성해, 려기(呂驥) 등이 창작한 대중적인 노래를 불렀다. 이러한 환경이 정율성을 자극하였다. 정율성은 섬북공학을 제1기로 졸업하면서 「섬북공학졸업동학가」[정호비 작사]를 창작하였고, 학생과 교원들에게 절찬을 받았다.
1938년에는 옌안에 노신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이 설립되자 곧바로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정율성은 동무들과 옌안 북문 밖 산에 올라 옌안 정경을 굽어보다 산 아래에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항일군정대학] 학생들의 노랫소리, 웃음소리 등 생기가 넘치는 광경과 장엄한 옌안 정경에 대한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정율성은 옆에 서 있는 노신예술학원 문학학부의 막야(莫耶)에게 가사를 써달라고 요청하였다. 같은 감정에 쌓여 있던 막야는 즉석에서 쓴 가사를 정율성에게 넘겨주었고, 정율성은 며칠이 지나 「연안송」을 완성하였다. 이 노래는 옌안성 예당[대강당] 야회에서 처음으로 정율성이 만돌린을 켜며 여가수 당영매(唐榮枚)와 함께 불렀다. 야회에 참석한 마오쩌둥[毛澤東]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얼마 후 중앙선전부에서는 「연안송」을 인쇄하여 연안 지구와 해방구의 모든 지역에서 부르게 하였다.
[「연안송」 가사]
보탑산 봉우리에 노을 불타고 / 연하강 물결 위에 달빛 흐르네 / 들판에 봄바람이 솔솔 불어와 / 산과 산 철벽을 이뤘네 / 아, 연안! / 장엄하고 웅대한 도시 / 곳곳에 항전 노래 울리네 / 아, 연안! / 장엄하고 웅대한 도시 / 정열이 끓어 넘친다 / 역동치는 심장에 / 정열의 불길이 타올라 / 들과 산에서 기나긴 행렬 / 견고한 철벽을 이루네 / 보라 우리의 각오를 / 보라 우리가 일어섰다 / 수많은 마음 하나 되어 / 원수를 향해 포효한다 / 병사들 총대 잡고 / 항일의리 싸움 나섰다 / 아! 연안 / 장엄하고 웅대한 도시 / 견고한 항일의 철벽이라 / 아! 그 이름 길이 빛나리 / 청사에 길이 빛나리라
[『팔로군 대합창』 창작]
1938년 7월말 노신예술학원을 졸업한 정율성은 8월에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 부임하였다. 항일군정대학 음악 교수가 된 것이다. 항일군정대학은 군사, 정치, 문화, 경제 등 각 방면의 간부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선성해의 『황하 대합창』에 영향을 받는 정율성은 1939년 7월 항일군정대학 선전과에서 함께 근무하는 시인 공목(公木)을 찾아가 함께 '팔로군 대합창'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하였다. 전선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은 공목은 며칠 사이에 가사를 써서 정율성에게 넘겨주었고, 정율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만으로 『팔로군 대합창』을 완성하였다. 『팔로군 대합창』은 「팔로군 군가」, 「팔로군 행진곡」, 「유쾌한 팔로군」, 「자야강 병사의 노래」, 「기병가」, 「포병가」, 「군대와 인민은 한 집안 식구」, 「팔로군과 신사군」등 8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1940년 초, 『팔로군 대합창』은 옌안 양가령(楊家嶺)에 있는 중앙대강당에서 정율성의 지휘와 노신예술학원의 악대, 합창단의 연주로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공연은 팔로군의 장병들과 군민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팔로군 군가」와 「팔로군 행진곡」은 다음 해 봄,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을 받고 잡지 『팔로군』에 발표되었다. 또한 『팔로군 대합창』은 1941년 5.4청년절에 음악 갑등상을 수여 받았다.
1947년 중국 해방전쟁(解放戰爭)[국공내전(國共内戰)] 시기에 팔로군은 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되어 「팔로군 행진곡」도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제목이 바뀌었으며,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속에서 군대 전사들의 노래가 되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 주석이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할 때,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이 반복 연주되었다. 1988년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곡명을 바꾸고,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이 비준함으로써 중국인민해방군의 정식 군가가 되었다.
1990년 9월 22일 제11회 아시안 게임이 베이징에서 열릴 때 수백 명의 마칭 밴드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연주함으로써 아시안 게임 개막을 알리기도 했다. 지금도 베이징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 정율성의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악보가 동판으로 새겨져 전시되고 있다.
1940년부터 1941년 사이에 정율성은 옌안에서 대합창곡 『가람요』[공목 작사], 『항일기병대』[가지 작사], 『반격을 준비하자』[색극 작사]와 가요 「벌목가」[정암순 작사]를 작곡하였다. 이 작품들은 모두 옌안 노신예술학원에서 공연되었고, 충칭[中京]에서 출판한 잡지 『음악』에 실려 전 중국에 소개되었다.
노신예술학원시절부터 서로를 지켜보던 정율성과 정설송(丁雪松)은 우여곡절 끝에 1941년 12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항일군정대학 여성대대장이었던 정설송은 뛰어난 중국 항일여성혁명가이며, 중국의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총애를 받은 양녀이기도 하다. 1979년 정설송은 중국의 첫 여성 대사로 주 네덜란드 중국 대사와 덴마크 특명전권대사를 역임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가사]
전진, 전진, 전진! /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고 / 조국의 토지를 밟으며 / 민족의 희망을 짋어지고 있는 / 우리는 하나의 무적의 역량 / 우리는 농민과 노동자의 자제 / 우리는 인민의 무장 / 두려움 없이 굴복은 없다 / 영특하고 용맹하게 전투해서 / 반동파를 깨끗이 소멸할 때까지 / 마오쩌둥의 기치는 높이높이 휘날린다 / 들어라! 바람이 외치고 신호나팔 소리가 울려온다 / 들어라! 혁명의 노랫소리 얼마나 우렁찬가! / 동지들 발맞춰 해방의 전쟁터로 달려가자 / 동지들 발맞춰 조국의 변강으로 달려가자 / 전진, 전진!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고 / 마지막 승리를 향하고 /전국의 해방을 향한다!
[정율성의 북한 시절]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자 조선의용군과 함께 정율성과 가족들은 1945년 12월 평양으로 건너갔다. 정율성은 같은 해 12월말에 해주시 황해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취임하여 일하면서 해주에 음악전문학교를 개교하여 음악 교육을 시작하였다. 1947년에는 해주에서 평양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 구락부 부장을 맡아 인민군 협주단을 창설해 단장에 취임하고, 전국 순회 공연을 200여 차례 치렀다. 또 「조선인민군 행진곡」과 『두만강 대합창』등을 창작하였다. 북한당국은 정율성의 이런 음악적 성과를 높이 평가해 1948년 모범근로자 칭호를 내렸다.
1949년에는 평양 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교수로 일했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한다. 부인 정솔성은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으로 귀환하겠다는 의사를 보였고, 9월에 딸 정소제(鄭小提)와 중국으로 돌아갔다. 10월에는 정율성도 어머니와 함께 중국으로 돌아갔다. 정율성은 중국에 귀화하였다.
[중국 건국 초기의 정율성]
중국 건국 초기[1952~1965년]는 정율성의 다작 시절이었다. 1952년에 「노동병은 7.1을 노래하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네」, 1953년에 대합창곡 『강 위의 노래』, 동요 「평화의 비둘기」, 가요 「흥안령에 눈꽃 날리네」, 「벌목가」 등을 작곡하였다.
정율성은 인민해방군을 동경하여 육군, 해군, 공군 부대를 방문하여 체험한 후 「강대한 함대 바다를 누비네」, 「포정은 출동하였다」를 작곡하였다. 1958년에는 문예계복건전선위문단에 참가하여 「바다의 초병」, 「유쾌한 해안포병」, 「우리는 인민의 쾌속정병」을 완성하였다. 1963년에는 전투기에 앉아 비행사들의 생활을 체험하면서 「비행원의 노래」, 「전진! 인민공군」등 10여 곡을 창작하였다.
1955년에 작곡한 대합창 『친선평화행진곡』[관화 작사]은 세계청년련환절에서 상을 받았다.
정율성은 단체에 가입하고, 단체를 위해 작곡하고, 배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작곡을 위해 경험하고, 작품을 출품하고, 작품의 연주 기회를 찾고, 연주단을 만들어 적극적인 공연을 펼치는 등 삶을 매우 적극적으로 이끌어간다. 적극적인 삶의 태도는 음악성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창작을 위한 새로운 소재를 위하여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등지에 내려가 민간 음악을 수집하고 중국의 소수 민족 바이족[白族]의 민간 전설과 음악을 연구하였다. 유럽 오페라를 공부하고 고대 윈난에 위치한 남소국을 배경으로 하여 5막 가극 『남편을 그리는 구름』을 완성하였다. 또 조선 민요를 연구하여 자신의 작품을 민요 선율을 반영하여 창작하기도 하였다. 『붉은 선동원』의 연극 음악인 「노들강변」, 「닐리리」, 「달아달아」, 「농부가」 등에 조선 민요 선율이 응용되어 있다.
[문화혁명 시기]
정율성의 말기[1966~1976년]에 해당되는 문화혁명 시기에 정율성은 창작 권리를 빼았겼다. 정율성은 억울한 울분의 시간을 창작을 위한 체험과 준비 기간으로 사용하였다. 발표할 수는 없었지만, 중국 혁명을 기리는 작품을 쓰기 위하여 정강산(井岡山) 문가시(文家市)에 찾아가 전위대원, 고립농들을 방문하고 중국혁명기념관을 참관한 뒤 대합창곡 『친선평화행진곡』을 완성하였다.
중국의 노농홍군(勞農紅軍)의 2만 5000리[약 9818㎢] 장정길을 따라 답사하고 체험하면서 교향 합창 『장정길에서』을 작곡하였다. 마오쩌둥 주석의 사(詞) 「심원춘·눈(沁園春·雪)」을 쓰기 위해서는 눈보라를 무릎쓰고 팔달령에 다섯 번이나 올라갔다.
1972년에는 「해방군조곡」[곽소천 작사], 「매령 3장」을, 1973년에는 연극 『운천전가』의 음악을 썼다. 1975년에는 교향 합창 『장정길에서』의 공연을 추진하였으나, 문화혁명 4인방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문화혁명이 막을 내리자 정율성은 창작 권리를 되찾았다. 그리고 문화혁명이 종지부를 찍었던 1976년에는 건군 50돌을 위한 대규모의 음악 작품을 창작 중이었다. 하지만 지병인 고혈압으로 절명하였다.
[의의와 평가]
정율성은 사상적으로는 항일·혁명 작곡가이며, 음악적으로는 치열한 현실주의적 노력파 작곡가였다. 정율성의 음악 수업은 짧았으나, 부단한 노력으로 부족한 음악성을 채워 갔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사용했던 정율성의 노트에는 음악 학습의 자취가 남아 있다. 피아노 연습, 작곡, 청음 등을 계획하여 날마다 표시하면서 실행에 옮겼다. 중국에서 국경을 넘을 때도 베토벤의 음반을 가지고 다니면서 듣고 연구하였다. 정율성은 중국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민요를 수집하였고, 중국과 조선의 민요를 바탕으로 작곡하였다. 또한 자신이 처한 곳을 위해 실용적인 작품을 끊임없이 써나갔다. 목표한 작품을 위해서는 답사하고 체험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정율성은 늘 이상을 꿈꾸는 사람이지만 현실을 반영하는 작곡가이기도 하였다. 정율성에게 혁명의 감동이 왔을 때 「연안송」을 창작하였고, 선성해의 작품으로 자극을 받았을 때는 실천하는 행동력으로 『팔로군 대합창』을 작곡하였다. 또한 옌안의 가창운동 조직자이었으며 추동자였다.
정율성의 음악 행로를 따라가다 보면 끝없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모차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정율성에게 들려오는 음악은 영감(靈感)이 되어 새로운 창작물이 생산되었고, 새로운 소재가 없었을 때는 역사적인 현장을 찾아가 조사하고 체험하면서 창작에 임하였다. 중국 전역의 민요를 조사하고 설화와 역사를 연구하여 가극을 탄생시켰다.
조선인임을 잊은 적이 없는 정율성은 조선의 민요를 바탕으로 가곡을 작곡하였다. 중국의 혁명에 문화적으로 커다란 공을 남긴 작곡가였지만, 1953년 중국음악가협회가 설립될 때에는 회원이 되지 못하는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율성은 중국에서 섭이, 선성해와 함께 3대 인민 음악가로 존경을 받고 있다. 또한 광주의 자랑스러운 작곡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