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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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弼禮 |
영어공식명칭 | Kim Pilry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출생 시기/일시 | 1891년 11월 19일 - 김필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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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895년 - 김필례 소래교회 김세학교에서 수학 |
수학 시기/일시 | 1903년 - 김필례 연동여중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3~1916년 - 김필례 일본 동경여자학원 중등부·고등부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25~1926년 - 김필례 미국 액네스스칼여자대학에서 역사 전공, 학사 학위 취득 |
수학 시기/일시 | 1926년 9월 - 김필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중등교육 행정학 전공, 석사 학위 취득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김필례 정신여학교 교사 재직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 김필례 흥학관에서 야학 강의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8월 18일 - 김필례 한국YWCA 총무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1921년 6월 - 김필례 수피아여학교 교사 재직 |
활동 시기/일시 | 1926~1937년 6월 - 김필례 수피아여학교 교감 재직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12월~1947년 2월 - 김필례 수피아여자중학교 교장 재직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3월 - 김필례 정신여자중학교 교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62년 - 김필례 정신학원 이사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72년 - 김필례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
몰년 시기/일시 | 1983년 7월 30일 - 김필례 사망 |
출생지 | 황해도 장연군 대교면 송천리 |
학교|수학지 | 소래교회 김세학교 - 황해도 장연군 |
학교|수학지 | 정신여자중학교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4길 16[잠실동 50-4] |
학교|수학지 | 동경여자학원 - 일본 도쿄 |
학교|수학지 | 액네스스칼여자대학 - 미국 조지아주 |
학교|수학지 | 컬럼비아대학 - 미국 뉴욕주 |
활동지 | 흥학관 -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
활동지 | 정신여자중학교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4길 16[잠실동 50-4] |
활동지 |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 광주광역시 남구 백서로 13[양림동 242] |
성격 | 교육자 |
성별 | 여 |
본관 | 광산 |
대표 경력 |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교장|정신여자중학교 교장|한국YWCA 초대 총무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교육자.
[개설]
김필례(金弼禮)[1891~1983]는 1891년(고종 28) 11월 19일 황해도 장연군 대교면 송천리에서 아버지 김성섬(金聖蟾)과 어머니 안성은(安聖恩) 사이에서 5남 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1892년(고종 29) 김필례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아버지 김성섬은 사망하였다.
1913년 일본 동경여자학원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모교인 정신여학교[지금의 정신여자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1937년 수피아여학교[지금의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교감을 거쳐 1945년 교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1947년에 정신여학교 교장을 거쳐 정신학원에서 이사장, 명예 교장, 명예 이사장을 지내며 여성 인재를 길러 냈다.
[활동 사항]
김필례는 1895년(고종 32) 황해도 장연군에 있는 소래교회 김세학교(金世學校)에서 교육받았다. 1903년 12세에 연동여중학교[지금의 정신여자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모교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8년 일본 동경여자학원에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떠났다. 1913년 일본 동경여자학원 중등부를 거쳐 1916년 고등부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4월에 다시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8년 6월 20일에 광주제중원(광주기독병원)의 의사였던 최영욱(崔永旭)과 결혼하였다. 김필례는 교사를 그만두고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00번지 일대]에 있던 흥학관(興學館)에 설치된 야학에서 가르치다가 1919년부터 1921년 6월까지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광주 3.10만세운동 때에는 김마리아가 동경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인쇄·배포하였다.
1922년 3월 중국 베이징[北京] 칭화[淸華]대학에서 열렸던 '세계기독교학생대회[WSCF]'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1919년 경기도 수원군[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교회에서 있었던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였다.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은 1919년 3.1운동 당시 기독교인과 부락민을 제암리교회 안에 몰아넣고 불태워 죽였던 사건이다. 1922년 김활란(金活蘭)과 함께 세계기독교학생대회에 참가해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설립한 뒤, 지방 조직을 갖추어 1923년 8월 18일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창립하였다. 회장으로 방신영(方信榮)을 선출하고 김필례는 총무를 맡았다.
1923년 4월에는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무주임으로서 복직하였다. 1925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조지아주 액네스스칼여자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다음해에 졸업하였다. 1926년 9월부터 미국 뉴욕주 컬럼비아대학에서 중등교육 행정학을 전공하여 문제아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26년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으로 돌아와 수피아여학교 교감으로 1937년 6월까지 근무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의 자매 단체인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하였다. 특히 1928년 인도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학생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그해 12월 수피아여자중학교 교장을 거쳐 1947년 3월에는 정신여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김필례는 종교 활동도 꾸준히 하여 1950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6월 2일 미국에서 개최된 '북장로교 여전도회 4년 연차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해 8월 30일 남편 최영욱이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하자, 1951년 미국에서 귀국하였다. 그 뒤 1962년 정신학원 이사장, 명예 교장, 명예 이사장을 지내다가 1983년 7월 30일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