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61 |
---|---|
한자 | 獨立運動-産室-女學校 |
이칭/별칭 | 광주수피아여학교,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소연 |
[정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는 여자 사립고등학교로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여성운동 및 독립운동의 산실.
[광주 최초 중등학교의 설립]
1907년 미국 남장로교회 유진 벨(Eugene Bell)[배유지(裵裕祉)] 선교사 사택에서 기독교 신자 자녀 4명을 모아놓고 가르치다가 그 수가 증가하게 되자, 남녀를 분리하게 되어 1908년 4월 1일 광주여학교(Kwangju Girls' School)가 설립되었다. 이때 같이 분리된 남학교는 훗날 숭일학교가 된다. 1908년 프레스턴(John F. Preston)[변요한(變要翰)] 목사 사택, 1909년 오웬(Clement C. Owen)[오기원(吳基元)] 목사 사택으로 옮겼다가 1911년 5월 '수피아 홀(Speer Hall)'을 지어 다시 옮겼다.
광주여학교에서 수피아여학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때는 1911년 5월 미국의 스턴스(M.L.Sterns) 부인으로부터 5,000달러를 기부 받아 3층의 회색 벽돌 건물을 지으면서부터이다. 스턴스 부인은 일찍 죽은 자신의 여동생 제니 스피어(Jennie Speer)를 애도하는 뜻으로 이 건물을 '수피아 홀'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학교의 공식 명칭인 '수피아여학교(Jennie Speer Memorial School for Girls)'가 되었다. 1912년 숭일학교와 더불어 고등과[중학교] 4년제와 보통과[소학교] 6년제 인가를 받았다.
[수피아여학교의 형성]
수피아여학교가 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백서로 13[양림동 242]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927년 1월 11일 미국 남장로회 부인전도회에서 윈스브로우(Wins borough) 여사의 주도로 모금한 5만 달러를 기증받아 붉은 벽돌 본관을 준공하여 11월 30일 완공되었던 때이다. 이 건물은 윈스브로우 홀로 명명하였다.
1914년 보통과 제1회 졸업식, 1915년 고등과 제1회 졸업식을 시작으로 1928년 4월 조선총독부 시책에 따라 보통과가 폐지되어 고등과만 남아 일제의 신사참배 탄압으로 인해 1937년 폐교하기 전까지 고등과 제18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수피아여학교와 독립운동]
3.1만세운동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청년층과 학생층이 주도한 경향이 짙었는데, 수피아여학교 역시 그 흐름에 앞장섰다. 수피아여학교의 졸업생이자 교사였던 박애순(朴愛順)은 전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에게 신문 기사를 읽어주며 독립운동이 필요함을 설명하였다. 수피아여학교의 학생들은 그 뜻에 공감하며 크게 호응하였다. 그러던 중 광주에서 대대적인 3.1운동이 일어날 태세가 갖춰졌고, 거사를 의논하는 모임도 열렸다. 수피아의 교사인 박애순, 진신애(陳信愛) 등이 이 모임에 참여하여 계획을 정했다. 그 결과 만세를 부를 날짜는 1919년 3월 10일로 결정되었고, 그 날을 기다리며 여러 학생들은 스스로 나서서 밤늦은 시간에 기숙사 지하실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1919년 3월 10일 낮, 드디어 독립 만세를 부르짖는 목소리들이 시작되었다. 광주의 작은 장날을 겸한 날이었기 때문에 거리에는 사람들이 즐비하였다고 하며,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사람들에게 준비해온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한데 모인 사람들은 우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이후 줄기차게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쳤다. 일제 헌병대는 시위대를 진압한다며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칼을 휘둘렀고, 그때 수피아여학교 학생인 윤형숙(尹亨淑)이 쓰러졌다. 왼쪽 팔이 잘려나가게 되어 많은 피가 흘렀음에도, 윤형숙은 오른팔로 태극기를 흔들며 그치지 않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 모습에 사람들은 격분하여 만세 소리는 더욱 크게 이어졌다. 이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수피아여학교 교사 2명, 학생 21명이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물산장려운동
3.1운동 이후,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항거하여 물자 아껴쓰기 및 우리 산업 경제를 육성시키자는 기치 아래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광주 지역에서도 1923년 3월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1,000명의 군중이 물산장려운동을 펼치게 된다. 토산(土産) 무명베로 두루마기 저고리를 만들어 입고 물산장려회 깃발을 들고 악대를 앞세워 「물산장려가」[국산품 애용의 노래]를 부르며 양림동에서 누문동까지 시위를 하였다. 한국인 상점들은 모두 축기를 달고 함께 동참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
3.1운동 이후 수피아여학교에서는 여전히 일제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았다. 1929년 11월 광주에서 전국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시작으로 1930년 3월까지 전국 194개 학교 5만 4,000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수피아여학교 역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이유로 1930년 1월 28일 무기 휴교에 처해졌다.
민족주의 비밀 결사 백청단(白靑團)
1930년 2월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학교 지하실에서 '백의민족의 청년'이란 뜻을 담은 비밀 결사단인 백청단을 조직하였다. 백청단 단원들은 항상 몸에 태극기를 지니고 다니면서 태극기의 의미를 설명하고, 조선민족의 문맹 퇴치를 목표로 여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백청단 단원들은 회비를 걷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학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1933년 1월 9일 일제의 탐문 수사 과정에서 백청단 독서 토론 모임의 내용을 기록한 일기장을 통해 백청단의 정체가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수피아여학교 교사 조아라(趙-) 등 9명이 피검되었고, 수피아여학교는 무기 휴교에 처해졌다.
신사참배 거부
'백청단 사건' 이후, 수피아여학교의 신앙교육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점점 더 심해지게 되었다. 1937년 3월 일제로부터 일본의 전승을 전 국민이 기원하는 신사참배를 1937년 9월 6일을 시한으로 하는 최후 통첩을 받게 된다. 1937년 9월 6일 오후,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임이 명백하므로 강요하면 남장로회 소속 학교들은 모두 폐교한다는 풀턴(C.Darby Fulton) 성명에 따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자진 폐교하였다.
[폐교 이후의 수피아여학교]
수피아여학교는 폐교 이후,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어 1942~1943년 12월까지 광주공립상업실수학교가 사용하였고, 1944년 5월부터 11월까지 광주의학전문학교가 개교하였다. 1945년 8.15광복 이후, 미군이 주둔하여 병사들의 막사로 사용되었다. 1945년 12월 5일 숭일학교의 세 교실을 빌어 복교[재개교]되었고, 1947년 6월 학교에 주둔한 미군이 철수하자 본 교사(校舍)로 돌아왔다. 1948년 6월 복교 후 첫 졸업식이 거행되었디.
1951년 8월 학제 개편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었으며, 1953년 4월 중학교 제24회 졸업식, 고등학교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1995년 5월 '광주 3.1만세운동 기념 동상'이 건립되었고, 2008년 10월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 이후 역사와 전통을 지닌 학교로 남아 있다.
[수피아의 인물]
후로렌스 룻(Florence Elizabeth Root)
한국명 유화례(柳華禮)는 수피아여학교 교장으로서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기독교 선교 활동과 교육운동에 생애를 바친 미국인 여성 선교사이다. 일제의 식민 정책 강요에 항거하여 자진 폐교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교육자로서의 양심을 굽히지 않았다. 폐교 후 나환자(癩患者)를 돌보며 직접 나환자의 아이를 둘이나 키우면서 농촌 순회 전도에 전념하였다. 1941년 광주부로 주거 제한 조치가 내려져 8월 강제 추방되었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한국이 자주 독립 국가임을 교계에 알리고 일제의 탄압을 폭로하였다. 광복이 되자 다시 광주로 돌아와 1948년 수피아여학교[지금의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제8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봉직하였다.
김필례는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수피아여학교 교사·교감·교장을 역임하였다.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운동과 광주의 계명(啓明)운동을 주도한 선구자였다. 조카인 김마리아가 1919년 2월 몰래 가져온 일본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문」을 복사하여 전국에 살포하였으며, 흥학관(興學館)에서 야학을 열어 광주 지역의 문맹퇴치운동에 나섰다. 또한 교회의 부인조력회를 만들어 전도와 사회봉사 활동에 앞장섰다. 1937년 6월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에 의해 수피아여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교감으로 봉직하였으며, 1945년 광복 이후 수피아여학교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1927~1931년 수피아여학교에 다니면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백청단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수피아학교 졸업 후에 이일성경학교[지금의 한일장신대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1933년 백청단 주동자임이 밝혀져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동창회 대표로 적극 반대하였고, 그로 인해 또 감옥에 잡혀 갔다. 1945년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평생 여성·인권·사회 복지·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였다. 조아라 선생을 기념하여 2015년 조아라의 호인 소심당(素心堂)을 따서 소심당 조아라기념관이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문을 열었다.
박애순
수피아여학교 교사로서 1919년 3월 9일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여 3월 10일 광주시민이 중심이 된 3.10만세운동에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을 참가시켰다. 독립선언문을 시위하는 군중에게 배포하며 활동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수피아의 문화재]
광주 구 수피아여학교 수피아 홀은 미국 스턴스 부인이 세상을 먼저 떠난 여동생 제니 스피어를 추모하기 위하여 기증한 5,000달러로 세운 건물이다. 중앙의 현관 포치 위쪽에 박공을 두어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1층과 2층 사이에 돌림띠로 장식하고 수직의 긴 창을 반복적으로 배치하였다.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붉은 벽돌이 아니라 회색 벽돌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광주 지역 개신교 선교의 근거지이자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꼽히는 수피아여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2005년 4월 15일 국가등록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광주 구 수피아여학교 커티스 메모리얼 홀은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한 전라도 지역 선교의 개척가인 유진 벨 목사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예배당으로 이용되었다. 전체적으로 중앙을 기점으로 대칭을 이루고 곳곳에 원형 창과 첨두아치 형상의 창문을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규모는 작지만 장식적인 요소가 많고 건축 기법이 우수한 건축물이다. 2005년 4월 15일 국가등록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1927년 건립된 광주 구 수피아여학교 윈스브로우 홀은 윈스브로우 여사가 받은 생일 헌금으로 건축을 전공한 미국 남장로회 스와인하트(Martin. Luther Swinehart)[서로득(徐路得)] 선교사가 건축하였다. 좌우 대칭의 중복도형으로 정면 출입구에 설치한 아담한 돌출 현관인 포치가 인상적이다. 이 돌출 현관 위 삼각형의 박공지붕[지붕면이 양쪽 방향으로 경사진 ㅅ자 모양의 지붕]과 이를 받치는 투스칸 오더(Tuscan Order)[배흘림 양식]의 원형 기둥은 다른 학교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2008년 2월 28일 국가등록문화재 제370호로 지정되었다.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소강당은 광주 근대 사학의 효시인 수피아여학교가 당시 학교 인가를 목적으로 1928년에 신축한 소강당으로 광주에 남아 있는 체육시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1945년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교사로도 사용한 바 있다. 붉은 벽돌로 건축되었으며, 독특한 박공지붕과 왕대공 트러스[큰 외부 하중을 지지하는, 긴 기둥 간격을 가진 구조물]인 산형 구조물의 중앙에 수직재가 있는 구조물 등은 당시의 건축양식과 기술을 후세에 전하는 중요한 건축물로서 가치가 높다. 2011년 7월 22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