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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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人-中心-3·10萬歲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성태 |
[정의]
1919년 3월 10일 천여 명의 학생·시민들이 광주천변 장터에서 독립 만세를 부른 후 시내 본정통[현 충장로] 일대에 진출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인 사건.
[개설]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파고다공원에서 울러퍼진 독립 만세의 함성은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3·1운동 또는 3·1만세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있던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광주에서의 3·1운동은 3월 10일 광주천 큰 장터와 작은 장터에서의 만세 시위 이후 행진을 시작으로 4월 8일까지 면 단위 횃불 시위 및 광주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로까지 이어졌다. 이 시위는 양림동 기독교인과 비밀 독서모임이었던 신문잡지종람소 회원인 젊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모의하고 준비하였지만, 숭일·수피아·농업학교 학생들과 광주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대규모 독립만세 시위였다.
광주 3·10만세운동 당시 수백 명이 체포되었고, 김복현 등 104명이 재판을 받았다.
[3·1운동의 전국 확산과 광주에서의 시위 준비]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광주·전남도 예외는 아니었다. 광주·전남에서의 최초, 최대의 3·1운동 시위지는 천여 명이 만세를 부른 3월 10일의 광주천 작은 장터였다. 그래서 광주 3·1운동을 3·10만세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광주의 3·1운동을 준비하고 모의했던 그룹은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과 양림동 기독교인들이었다. 광주보통학교와 농업학교 졸업생이 주축이 된 신문잡지종람소[삼양양조장 전신] 회원들은 신문 잡지를 윤독하고 유명인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광주 출신 일본 유학생들과 접촉하면서 국내·외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신문잡지종람소 회원으로는 정상호를 비롯하여 김복수, 김용규, 한길상, 최한영, 강석봉, 김태열, 강생기 등 10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광주 3·1운동 당시 유인물을 인쇄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4년 유진벨(Eugene Bell)[한국명 배유지] 선교사가 양림동에 정착하면서, 양림동에는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가 들어서고 제중원[현 기독병원]이 건립되었다. 당시 광주읍성 안에 북문안 교회가 있었고, 장로였던 최흥종 등이 서울 기독교 세력과 연결되어 연락하고 있었다.
광주에서의 3·1운동은 광주 출신으로 도쿄(東京) 메이지대학에 유학 중이던 정광호가 최팔용 등 11인이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발표된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광주에 내려오면서부터였다. 1919년 2월 2일, 정광호는 서울에서 광주 출신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재학 중인 김범수 등과 만나 2·8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배포키로 하고, 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김기형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2월 말 서울에서 광주의 3·1운동을 논의하기 위해 김필수 목사가 독립운동준비위의 밀명을 받고 내려와 북문안 교회 최흥종 장로와 김철 등을 만났다. 이후 두 사람은 3월 2일 서울로 상경하여 김범수 등 유학생들을 만나 광주 3·1운동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후 광주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최흥종은 3월 5일 남대문 역전에서 인력거 위에 올라가 ‘신 조선신문’이란 유인물을 나눠주며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연설하였다. 이어 대한문 앞 인력거 위에서 ‘조선 독립’이라 쓴 깃발을 흔들며 시위를 선동하다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고, 결국 자신이 맡은 광주에서의 중책을 수행하지 못한 채 구속되고 말았다. 최흥종의 체포를 확인한 김복현[김철]은 3월 6일 손병희 외 32인이 서명한 3·1독립선언서 등 5종류의 문건을 지참하고 광주로 내려왔다.
김복현은 곧바로 북문안교회 교인이자 절친이던 김강과 만나 전략을 수립하였고, 광주 출신인 김강은 양림동 남궁혁의 집에 김복현을 비롯, 최병준, 송흥진, 최정두, 한길상, 김용규, 김태열, 강석봉, 손인식 등 10명을 모았다. 이들 모두는 양림동 기독인들과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모여 다음 사항을 결정하였다.
- 3월 8일 큰 장날을 기해 독립 만세운동을 개시한다.
- 독립선언서 등의 인쇄는 시내 조선인 청년이 담당한다.
- 인쇄용지 1만 장은 강석봉이 구매한다.
- 인쇄용기는 숭일학교 소장의 등사판을 사용한다.
- 김태열은 보통학교 생도를 담당한다.
6일 남궁혁 집에서의 모의 후 각자의 임무가 정해지면서 8일 큰 장날의 독립만세를 위해 각자가 맡은 일을 열성적으로 추진하였다. 강석봉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백지 만 장을 구입하였고, 숭일학교 농감인 송흥진과 교사 손인식은 숭일학교 소유의 등사판 2개를 가지고 와 김강에게 건넸다. 독립선언서와 격문, 애국가 등의 인쇄는 최한영의 집에서 김용규, 한길상 등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에 의해 인쇄되었다.
[3월 10일 시위의 경과]
1919년 3월 8일 큰 장날을 기해 만세를 부르려던 계획은 독립선언서 등 인쇄가 마무리되지 못해 3월 10일 작은 장날로 연기되었다. 10일 오후 3시 30분, 광주교 밑 모래사장에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들자, 김복현·김강·서정희 등은 군중들과 함께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운동의 개시를 선언하였다. 이어 시위 군중들은 ‘조선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고 국기를 휘날리며 강가 모래밭에서 언덕으로 올라와 작은 시장으로 출발, 양림리 방면에서 달려 온 숭일학교 학생 100여 명, 수피아여학교 여학생 30여 명, 작은 시장에 모인 시민 수백 명과 합쳐졌고, 시위 군중은 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부동교 밑 작은 장에서 대규모 만세를 부른 후 김복현·서정희·최병준 등이 지휘한 시위 군중은 작은 시장을 출발, 서문통을 거쳐 우편국[충장우체국] 쪽을 향해 행진하였다. 숭일학교 농감인 송흥진이 대형 태극기를 휘날리며 선두에 섰고, 그 뒤를 숭일·수피아 여학생과 시민들이 따랐다. 시위 군중은 우편국에서 좌회전하여 본정통[충장로]으로 돌아 북문 밖에서, 누문리 방면에서 만세를 외치며 당도한 농업학교 학생 및 시민 수백 명과 다시 합쳐지면서 시위 군중의 규모는 천 수백여 명으로 더 늘어났다.
시위 군중은 다시 역행하여 본정통을 지나 우편국으로 행진하면서 구한국 국기를 휘날렸고, 모자를 흔들었으며, 양손을 들고 수시로 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무렵 지산면 방면에서 범윤두·이주상 등이 생용·일곡 일대의 농민과 함께 시위 행진에 합류하였다.
당시 만세의 모습을 신문잡지종람소 회원이던 최한영은 “쌀 장사는 쌀 되박을 높이 들고, 식육점 주인은 저울을 들고, 양은 그릇 장사는 양은 그릇을 두들기며 만세를 외쳐댔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실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인물 중에는 석유를 파는 상인, 안마사, 대장간에서 일하는 대장장이, 신발가게 상인, 이발사, 목수 등도 있었다.
시위 군중이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기마헌병대가 출동하여 주동자를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군중들이 “우리가 자진해서 경찰서로 가겠다.”고 외치며 광주경찰서 앞마당으로 몰려 들어갔고, 이에 일제는 소방대·재향군인회 소속 회원들까지 동원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열 대여섯 살의 어린 소녀들까지도 무자비한 폭행을 자행하였다. 이때 수피아 여학교 윤형숙은 일본 헌병이 내리친 칼에 왼팔이 잘리는 등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벌겋게 물들었으며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3월 10일 시위에서 다수의 주동 인물이 체포되자, 시위에 참가하였던 제중원 회계직원이던 황상호는 독립의식을 높이고 다음 거사를 위해 윤익선 명의로 발행되었던 「조선독립신문」을 모방하여 「조선독립광주신문」 1~3호를 발간하였다. 「조선독립광주신문」의 원본은 1983년 목포 정명여고 선교사 사택 보수공사 도중 천장에서 독립가, 3·1독립선언문, 2·8독립선언문, 격문 등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 신문은 1919년 4월 8일 목포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양동교회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4·8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광주 3·1만세운동은 다음 날인 11일에도 일어났다. 오후 5시 무렵 숭일학교 학생과 농업학교 학생이 선두가 된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이 대열을 지어 만세를 부르며 시내를 행진하였다. 그리고 13일 큰 장날에도 장꾼들을 포함한 천여 명의 군중이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또 외첬다. 상인들도 가게 문을 닫고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광주의 학생과 상인 등의 만세시위는 송정리와 근교 농촌 마을로 파급되었다. 비아·하남·임곡·동곡·평동·삼도·본량 등 각 면에서는 4월 1일까지 밤이 되면 산에 봉화가 올랐고, 들에서는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4월 8일에는 광주보통학교 4년 최영섭 등이 주도한 자혜병원[현 전남대학교 의대병원] 앞 시위도 있었다.
[광주 3·10만세운동의 동력, 학생]
광주의 3·1운동인 3·10만세운동과 연루되어 체포된 104명은 주모자, 적극 가담자, 「조선독립광주신문」 발간 및 배포자, 그리고 광주보통학교 학생, 김순천 등 다섯 그룹으로 나뉘어 재판을 받았다. ‘김복현 외 21인’, ‘박애순 외 76인’, ‘황상호 외 2인’, 광주보통학교 학생 ‘최영섭’, 농민 '김순천'이 그들이다. 모의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후 주도한 주모자로 분류된 ‘김복현 외 21인’은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부터 1.6년을 선고받았으며, 독립선언서 배포 및 적극 가담자로 분류된 ‘박애순 외 76인’은 1.6년에서 0.4년을, 「조선독립광주신문」을 간행했던 ‘황상호 외 2인’은 3년과 2.6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그리고 보통학교 학생이던 최영섭은 1년을, 농민 김순천은 0.6년을 선고받았다.
재판이 시작되는 날 일본인 호리에(堀江) 검사가 “국헌을 교란시킨 죄는 사형에 처해 마땅하나 관대히 다스리겠다.”고 하자, 광주 3·1만세운동의 책임자였던 김복현은 “이번 운동의 책임자는 나다. 내 지시에 따른 학생들은 그냥 내보내라. 그리고 내 이름은 김철(金鐵)[김복현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불에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얼마든지 해보라.”면서, 이번 광주 만세운동은 전적으로 자기 한 사람에게 죄가 있을 뿐이라고 항변하였다.
광주지방법원의 형량에 김복현 등 다수는 불복하여 대구 복심법원에 공소하였지만, 일부를 제외하고는 광주지방법원의 형량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재판을 받고 복역 중 사망한 분도 있다. 숭일학교 졸업생 송광춘이 그이다. 송광춘은 만세 시위 중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타박상을 입고 있었는데, 1919년 12월 하순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대구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송광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유해가 송정역에 도착하자 숭일학교 학생을 비롯한 광주청년회 회원들은 송광춘의 유해를 상여에 안치한 채 30리를 걸어 광주까지 운반하였다. 송광춘의 시신과 관련하여 민심이 술렁이자, 일제는 숭일학교 지하실에 안치한 유해를 압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광주 3·1운동 당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104명 중 농업 종사자 16명, 병원 종사자 8명, 교사 7명, 고용인 6명, 학생 53명, 무직 7명, 기타 7명이다. 광주 3·1운동 당시 재판을 받았던 104명 중 가장 많은 직업은 학생으로 53명이다. 그중 숭일학교 학생이 24명으로 가장 많고 수피아여학교 여학생 20명, 농업학교 학생 6명, 대학생 2명, 보통학교 1명 순이다. 재판받은 분 중 학생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은 광주 3·1운동을 모의 기획한 것은 신문잡지종람소 회원인 청년들과 양림동에 거주하는 기독인들이었지만, 앞장서 만세를 불렀던 핵심 동력은 시민과 학생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학생들의 항일 독립정신은 10년 뒤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또 계승되어 실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