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035 |
---|---|
한자 | 證心寺 |
영어공식명칭 | Jeungsimsa Temple |
이칭/별칭 | 징심사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증심사길 177[운림동 56]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최원종 |
건립 시기/일시 | 847~868년 - 증심사 창건 |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094년 - 증심사 혜조국사 중창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443년 - 증심사 김방 삼창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609년 - 증심사 석경·수장·도광 사창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970~1980년 - 증심사 복원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6년 11월 1일 - 증심사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1년 - 증심사 6.25전쟁 때 오백전, 노전, 회심당을 제외하고 화재로 소실 |
현 소재지 | 증심사 - 광주광역시 동구 증심사길 177[운림동 56] |
성격 | 사찰 |
창건자 | 철감선사 도윤 |
전화 | 062-226-0108 |
홈페이지 | http://www.jeungsimsa.org |
[정의]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 소속 사찰.
[개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道允)이 창건한 사찰로 무등산의 대표적인 불교 도량이다.
[건립 경위 및 변천]
증심사(證心寺)는 철감선사 도윤이 860년(신라 헌안왕 4)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일부 다른 기록에는 창건 연대를 달리 보기도 한다. 1924년에 간행된 『광주읍지』에는 517년(신라 법흥왕 4)에 중국 양나라 고승인 철감국사가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934년에 간행된 『광주군사』에는 518년(신라 법흥왕 5)에 창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라남도 화순군 쌍봉사(雙峰寺)의 「쌍봉사창건비문(雙峯寺創建碑文)」에는 중국 양나라 천감년간(天監年間)[502~519]에 소주(韶州) 사람인 철감선사가 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철감선사는 798년(신라 원성왕 14)에 출생하였고, 18세에 출가한 후 825년(신라 헌덕왕 17) 당나라에 들어가 남전보원(南泉普願)에게서 선법을 얻은 후에 847년(신라 문성왕 9)에 귀국하였다. 철감선사가 귀국한 847년에서 화순 쌍봉사에서 입적한 868년(신라 경문왕 8) 사이에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094년(고려 선종 11)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창하였으며, 1443년(세종 25)에 당시 전라도관찰사 김방(金倣)이 오백나한(五百羅漢)과 16제자상을 조성하여 오백전(五百殿)에 봉안하여 삼창하였고, 1609년(광해군 원년)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석경(釋經), 수장(修裝), 도광(道光)이 사창하였다.
1951년 6.25전쟁 당시 오백전과 노전(爐殿), 회심당(繪心堂)을 제외하고 모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71년 신도들의 노력으로 대웅전이 복원되었으며, 다른 부속 건물들이 재건되었다. 현재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1970~1980년대 사이에 복원된 것이다.
1966~1967년에는 불교 승단의 분규로 인해 사찰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처 비구승들 간의 싸움이 벌어졌고, 이후 송광사의 말사로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증심사의 사명을 징심사(澄心寺)로 표시하기도 한다. 1856년(철종 7)에 작성된 「중수약사전기(重修藥師殿記)」, 1868년(고종 5) 무등산을 유람하고 지은 나도규(羅燾圭)의 「서석록(瑞石錄)」, 1891년(고종 28) 이연관(李淵觀)의 「신묘유서석록(辛卯遊瑞石錄)」, 1909년 김운덕(金雲悳)의 「서석유람기(瑞石遊覽記)」, 1912년 양재경(梁在慶)의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 1926년 『광주읍지』의 기록에는 징심사로 되어 있다. 1800년대 어느 시점에서 증심사에 징심사로 사명의 변경이 있었던 듯하다. 다만 나도규의 「서석록」과 1899년(고종 36)에 간행된 『광주읍지』 사이에 간행된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증심사로 되어 있어, 이 당시에는 증심사와 징심사 2개의 사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활동 사항]
오백나한은 불교의 깨달음의 한 단계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한 500명의 성자를 뜻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보통 신통력을 갖춘 존재로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해 준다고 믿어 나한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우리나라 사찰에는 보통 나한전(羅漢殿)이 존재하기도 하는데, 증심사와 같이 오백나한을 봉안한 경우는 경상북도 영천군 은해사(銀海寺) 거조암(居祖庵)의 오백나한상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사(雲門寺)의 오백나한전이 있다. 증심사오백전은 조선시대에 전라남도 지역에 창건된 것으로는 유일한 예이다.
[관련 문화재]
증심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光州證心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증심사삼층석탑(證心寺三層石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증심사오백전(證心寺五百殿),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증심사석조보살입상(證心寺石造菩薩立像)이 있으며, 증심사 일원이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원래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의 대황사(大皇寺)에 있던 것을 1934년 대황사가 폐사되면서 증심사로 옮겨 왔다고 한다. 옮길 당시 대좌와 광배가 유실되었으나 그 외에 다른 부분은 완전하게 남아 있다. 증심사석조보살입상은 원래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정곡리의 서봉사지(瑞峯寺址)에 있던 것을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부호(富豪) 현준호(玄俊鎬)의 도움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