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제2·3대 정·부통령 선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58
한자 大邱- 第二·三代 正 副統領 選擧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2년 8월 5일연표보기 - 대구의 제2·3대 정·부통령 선거 실시
성격 제도|선거

[정의]

1952년 8월 5일 대구에서 실시하였던 정·부통령 선거.

[역사적 배경]

6·25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의원들이 60% 이상 당선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의 간접선거에 의한 재선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대통령직선제를 위한 개헌을 시도하는 한편, 지지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임시 수도 부산에서 1951년 12월 17일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자유당은 의원내각제를 지지하는 원내자유당과 대통령직선제를 지지하는 원외자유당으로 양분되었다.

1952년 4월 17일 국회의원 123명의 이름으로 의원내각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대통령직선제를 지지하는 원외자유당은 의원내각제 개헌안에 반대하는 18개 단체를 모아 ‘전국정당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의원내각제 개헌안에 대항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4월 실시된 시·읍·면의회 의원 선거와 5월 실시된 도의회 선거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두어 권력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5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고, 7월 4일 임시 수도 부산에서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무장 경관과 헌병들이 포위한 가운데 기립표결로 통과시켰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으로 개정된 헌법에 의거하여 1952년 8월 5일 ‘제2·3대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경과]

대구에서도 1952년 8월 5일 대구의 제2·3대 정·부통령 선거가 시행되었다. 선거는 오전 7시에 대구 시내 108개 투표소에서 투표가 진행되었다. 대구의 유권자 수는 16만 9717명이었다. 투표율은 유권자의 73%에 해당하는 12만 4341명이었다. 개표는 8월 6일 오전 6시부터 정오 12시까지 시내 갑·을·병 개표구 선거위원회에서 진행되었다.

[결과]

대구의 제2·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결과는 대통령의 경우 이승만 후보가 최다 득표인 5만 7775표로 1위를 차지하였다. 조봉암 후보가 2만 8252표, 이시영 후보가 2만 7478표, 신흥우 후보가 2,776표를 차지하였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조병옥 후보가 3만 1858표로 최다 득표를 하였고, 이어 이범석 후보가 2만 74표, 함태영 후보가 1만 9794표, 이갑성 후보가 1만 8706표, 이윤영 후보가 1만 1065표, 전진한 후보가 6,762표, 백성욱 후보가 5,427표, 임영신 후보가 3,746표, 정기원 후보가 3,642표의 순서로 득표하였다. 전국의 선거 결과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무소속의 함태영(咸台永)이 당선되었다.

[의의와 평가]

1952년 제2·3대 정·부통령 선거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최초로 치러진 정·부통령 직접선거였다. 대구의 선거 결과는 대통령의 경우 전국과 동일하게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를 선택하였고, 부통령의 경우 전국과 달리 조병옥 후보를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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