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3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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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禹希烈 |
영어음역 | U Huiyeo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성호 |
[정의]
조선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단양(丹陽). 고문하시중(門下侍中) 우천석(禹天錫)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우팽(禹伻)이며, 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우복생(禹福生)이며, 어머니는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 진주유씨(晋州柳氏)이다.
[활동사항]
우희열은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가 1404년(태종 4) 호조전서(戶曹典書)가 되고 1408년(태종 8) 판원주목사(判原州牧事)로 나아갔으나 민무구(閔無咎) 사건에 연루되어 하옥되기도 하였으나 곧 풀려났다. 다음 해 3월 제언(堤堰) 수축을 통한 수리(水利)의 개발을 주장하였다. 1413년에는 충청도도체찰사(忠淸道都體察使)의 직임을 맡고 조운(漕運)의 편의를 위하여 시도된 태안반도 운하 개통 사업, 즉 축제(築堤) 사업을 주관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경기(京畿)와 충청(忠淸) 양도의 권과농상사(勸課農桑使)로 나가 제언 수축과 뽕나무를 심는 일을 권장하였다.
1415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고, 같은 해 말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가 1417년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가 되었다. 1418년 판청주목사(判淸州牧事)로 있을 때 전국 각지에 있는 제방과 관개 시설의 목록을 갖추어 매년 관리하게 하고 경차관(敬差官)을 보내 감독하게 하자는 건의를 올려 실현시켰다. 또 김제 벽골제(碧骨堤), 부평 수통제(水桶堤) 등의 수축에 큰 공을 세웠다. 우희열은 태종대의 수리전문가로서 수리시설 수축에 큰 활약을 펼쳤다.
[묘소]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사천마을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