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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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普覺國師 |
영어의미역 | Leader of the Nation Bogak |
이칭/별칭 | 풍양(豊壤),조혼수(趙混脩),무작(無作),환암(幻菴),보각(普覺),정혜원융(定慧圓融)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현길 |
[정의]
고려 후기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했던 승려.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속명은 조혼수(趙混脩),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菴), 탑호는 정혜원융(定慧圓融). 풍양조씨 전직공파 조지란(趙之蘭)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조숙령(趙叔鴒), 어머니는 청주경씨이다.
[활동사항]
보각국사는 1320년(충숙왕 7) 3월 13일 아버지 조숙령의 임지인 용주(현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청주경씨의 권유로 13세부터 대선사 계송(繼松) 밑에서 공부하여 1341년(충혜왕 복위2) 22세의 나이로 승과 선종선에 급제했다. 1348년(충목왕 4) 금강산에 들어가 2년 동안 공부한 후 선원사의 식영감 화상에게서 능엄경을 배웠다.
재상 조쌍중(趙雙重)이 지은 휴휴암에 초빙되어 3년간 능엄의 법요를 강연한 후 충주 청룡사 서쪽에 연회암을 짓고 머물렀다. 공민왕이 회암사 주지가 되어 주기를 요청했으나 사양하고 오대산 신성암에 머물면서 나옹(懶翁) 화상과 불도(佛道)를 논했다. 1361년(공민 10) 공민왕의 요청으로 궁궐에서 법회를 열었으나 도중에 도망친 후 명산과 사찰을 주유했다.
1370년(공민 19) 공부선장(工夫選場)에서 단독으로 선발되었으나 궁궐에 머물게 하는 줄 알고 도망쳐 봉황산에 숨었다. 그 후 왕명에 의해 불호사 등을 거쳐 1374년 궁궐 내불당에서 불법을 설하였다. 우왕 초에 송광사, 서운사에 머물다가 충주 연회암으로 돌아왔다. 다시 우왕의 요청으로 광암사에 3년을 머물다가 도망하여 여러 사찰을 거친 후 연회암으로 돌아와 1378년부터 수년간 불경의 간행에 힘을 기울였다.
1383년(우왕 9) 국사에 책봉되고 개천사 주지가 되었으나 이듬해 왜구가 충주에 침범하자 광암사로 옮겼다. 1388년(창왕 즉위년) 개천사로 돌아왔고, 1392년(공양 4) 7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축하의 표문을 올리고 충주 청룡사로 옮긴 후 1392년(공양왕 4) 9월 18일 입적하였다. 왕의 부름에 쉽게 응하지 않은 것은 속세의 명리에 초연한 참된 구도자의 길을 걸었음을 말해 준다.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등 당대의 유학자들과도 교유했다.
[저술 및 작품]
전해지는 저서 4편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1378년에 저술된 『선림보훈(禪林寶訓)』 2권 2책은 보물 제700호, 1378년에 저술된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권 상·하〉 2책은 보물 제720호, 1379년에 저술된 『호법론(護法論)』은 보물 제702호, 1381년 저술된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은 보물 제6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보각(普覺)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부도가 건립되고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륭탑이라 칭하였다. 1394년(태조 3) 탑비가 건립되고 권근이 비문을 지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은 국보 제197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는 보물 제6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번지 청룡사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