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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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墳 |
영어의미역 | Ancient Tomb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강민식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에 분포하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무덤.
[개설]
충주는 중원문화권의 중심지로 삼국시대에 백제·고구려·신라에 의해 차례로 영유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중원경(中原京)이 설치되었다. 충주에 분포하는 고분은 고대 충주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금릉동·용관동 백제 고분군과 대소원면 두정리의 고구려 석실분은 신라가 충주로 진출하기 이전에 충주를 배경으로 한 삼국의 각축전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이후 충주에 진출한 신라는 먼저 누암리·하구암리 일대에 대규모의 고분군을 조영했으며, 점차 충주 여러 곳에 소규모의 고분군을 조영하였다.
[원삼국시대~백제시대]
1. 금릉동 유적
2004년 시굴 조사와 발굴 조사 결과 구석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구 210기가 확인되었다. 가장 많은 유구가 조사된 원삼국시대의 유구는 토광묘 149기와 옹관묘 1기이다. 토광묘는 합장묘 13기와 주혈이 확인된 토광묘 5기를 포함한다. 토광묘는 서로 중복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비교적 짧은 기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주구토광묘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주혈을 가진 토광묘는 목곽묘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고자는 목곽계 목관묘로 구분하였다.
토광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매우 다양하다. 토기는 240여 개체로 원저단경호(93개체)와 발형 토기(122개체)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같은 시기 부장 유물의 일반적인 조합상을 보인다. 기타 특징적인 토기로는 복구연호(複口緣壺) 1점과 기마인물상 파수부 유개호 1점 등이 있다. 철기는 227점으로 무기와 마구류, 농공구류 등이 대부분이다. 무기류는 서로 다른 제작 기법을 보이는 2점의 환두대도, 철모 8점, 철촉 21점 등이다. 특히, 마구류는 그 유입 시기를 종래 4세 이후로 편년하던 것을 3세기대로 올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 용관동 고분군
1991년 발굴 조사를 통해 모두 3기가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1기는 완전히 파괴되어 형태를 알 수 없고, 2기는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 수혈식 석곽묘이다. 무덤의 축조 방식은 토광묘의 축조 방식과 유사하다. 축조 시기는 2호분의 축조 방식이나 출토 유물을 통해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이르는 백제계 무덤으로 보고되었다.
1호분은 경사면에 직교하는 장축 방향의 세장형(細長形)으로 남쪽을 터 연도로 사용한 듯 보인다. 바닥은 생토면에 할석을 깔아 시상을 만들었다. 안쪽에서 관못과 관고리가 나온 것으로 보아 관을 사용한 듯하며, 이 밖에 은제 장식편과 금세환이 출토되었다. 2호분은 동쪽 벽을 연도로 사용했으며, 시신이 놓인 부분은 할석을 둘러 시상 형태를 갖췄다. 내부에서 숟가락, 철부, 철겸조각, 도자조각, 가락바퀴, 평저병형 토기, 완 등이 출토되었다. 파괴된 3호분의 언저리에서는 단각원투공고배조각이 수습되었다.
[고구려시대]
고구려시대 고분군으로는 두정리 고분군이 있다. 충주시의 클린에너지파크 조성을 위한 문화 유적 발굴 조사에서 B지구로 명명된 곳에서 고구려계 석실분 6기, 단야로 3기, 수혈 유구 4기, 온돌 유구 1기가 확인되었다. 이 밖에 C지구에서는 기와가마 1기와 소성 유구 2기도 확인되었다. 석실분은 장축이 남북 방향이며, 1m 내외 간격으로 나란히 위치한다.
1호분을 제외하면 모두 연도가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바닥을 불다짐하여 정지한 흔적이 보인다. 2호분에서는 벽면에 회칠 흔적이 확인된다. 2호분과 4호분은 추가장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2호분의 남서쪽 바닥에서는 높이 17.5㎝, 지름 17.2㎝ 크기의 단경호가 출토되었다. 단경호는 적갈색의 연질 토기로 바닥은 평저이며, 바깥 면은 타날한 후 물손질하였다.
6호분의 중앙쪽에서는 장동호가 수습되었다. 장동호는 흑갈색의 사립이 섞인 연질로 바닥은 평저이고, 동체 상단에 횡침선과 상하로 파상문이 시문되었다. 토기의 위쪽이 깨져서 전체 크기를 알 수 없다. 4호분에서는 지환이 출토되었다. 석실분에서는 모두 관정이 출토되었다. 관정은 머리가 둥글고 몸체는 긴 꼴이다.
[신라시대~통일신라시대]
1. 누암리 고분군
남한강변의 누암리 뒤쪽에 있는 해발 150m의 얕은 구릉에 위치하며, 사적 제46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 일대는 충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문화권 일대의 삼국시대 고분군 가운데 무덤이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현재 20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1차례의 지표 조사와 3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신라 때의 굴식 돌방무덤과 돌덧널무덤 등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의 돌덧널무덤과 토광묘 등이 확인되었다.
굴식 돌방무덤은 평면이 네모꼴로 시상대가 마련되어 있으며, 돌방의 벽은 지하가 아닌 지상에 축조되었다. 널길은 중앙이나 한쪽에 치우쳐 설치되었고, 봉분 주위에는 호석을 둘렀다. 유물은 굽다리접시, 목이 짧은 항아리, 굽다리항아리, 금제 반지, 쇠손칼 등이 출토되었다. 신라의 굽다리접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분의 형성 시기는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누암리 고분군은 신라 진흥왕대[540~576]에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경주에서 이주해온 귀족들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2. 하구암리 고분군
1992년 누암리 고분군에 대한 지표 조사에서 하구암리 퉁점 일대를 조사하면서 퉁점 고분군이라 하였다. 1997년 충주박물관은 중부내륙고속도로 건설 구간 문화 유적 지표 조사에서 이 일대의 고분군을 능골, 큰골, 도장골, 퉁점Ⅰ·Ⅱ·Ⅲ, 중구로 구분하여 보고하였다. 이 조사 결과에 따라 1999~2000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시굴 조사와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퉁점Ⅱ 고분군 1기, 큰골 유적 4기의 삼국시대 석실분이 확인되었다.
한편, 1999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는 지표 조사를 통해 400여 기의 석실분과 석곽묘가 발견되는 하구암리 일대를 하구암리 고분군으로 일괄하였다. 또한 1992년 이미 누암리 고분군 지표 조사에서 언급한 퉁점마을 뒤쪽 능선에 대한 시굴 조사를 통해 8기의 석실분과 1기의 건물터를 확인하였다. 시굴 조사와 발굴 조사를 통해 하구암리 고분군에 대한 대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석실분의 조영 양식과 유물을 통해 퉁점마을 뒤쪽의 퉁점 고분군은 누암리 고분군과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큰골 유적은 7세기 초반~후반의 유적으로 편년되었다.
3. 용산동 유적
2005년 용산동 1665번지 일대의 아파트 건설부지에서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석곽묘 13기가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3기는 횡구식 석실로 추정되었다.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토기로는 3호분의 병 1점, 7호분의 연질 완, 13호분의 고배 4점 등이 있다. 보고자는 유구 현상을 구분하여 시상이 설치된 1호분,2호분, 13호분은 6세기 후반 이후, 인화문 병이 출토된 3호분은 7세기 중엽 이후로 보았다. 그 밖에 다른 석곽묘의 일부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4. 수룡리 유적
중앙탑면 면소재지에서 노은으로 향하는 지방도 520호선을 따라 수룡교를 지나 오른쪽 북향하는 능선에 위치해 있었으나, 현재는 북충주IC가 들어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2001~2002년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충주IC가 추가로 신설되면서 해당 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삼국시대 석실분 4기, 고려시대 회곽묘 2기, 고려시대 이후 토광묘 40기, 수혈 유구 10기, 소성 유구 2기, 회곽묘 6기 등이 조사되었다.
석실분은 경사면을 파서 평탄하게 만든 후 자연석을 쌓아 올렸다. 천정은 2호분과 3호분의 잔존 형태를 통해 평천정으로 추정된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며, 연도는 파괴되어 형식을 알 수 없다. 시상은 석실의 장축 방향으로 한 벽에 붙여 강돌과 할석을 한두 겹 다져서 설치하였다. 피장자는 대략 북쪽으로 머리를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2호분과 4호분에서 유개합 3점, 고배 1점, 개 1점, 병 1점 등 6점이 출토되었으며, 시기는 대략 7세기 말경으로 편년된다.
5. 단월동 고분군
1993년과 1994년 2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에서 모두 15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1차 발굴 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전기와 후기의 고분 7기가 조사되었다. 2차 발굴 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2기, 고려시대 토광묘 5기와 석곽묘 1기가 확인되었다.
1차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2호분·4호분·6호분·9호분은 통일신라시대 전기, 5호분과 10호분은 통일신라시대 후기로 편년되었다. 이 고분들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고분으로 평가된다. 가장 규모가 큰 9호분은 바깥쪽으로 장타원형 호석을 두르고 주위에 3개의 부곽이 딸린 특이한 양식이다. 후기로 편년된 10호분도 3기의 작은 부곽이 딸려 있다. 2차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A-1호분은 한 봉분 안에 3기의 고분이 안치된 매우 특이한 형식으로 통일신라시대 말에서 고려시대 초로 넘어가는 가족묘의 한 형태로 파악되었다.
[기타]
이 밖에 정식 발굴 조사를 거치지 않았으나, 마수리·신중리·탑평리·장천리 등에서 삼국시대의 고분군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