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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148
한자 中原郡
영어의미역 Jungwon-gun County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현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행정구역
관련문헌 『삼국사기』|『고려사』|『충주 중원지』|『중원군 39년사』

[정의]

1956년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됨에 따라 1995년까지 읍의 외곽 지역 12개 면을 관할했던 행정구역.

[개설]

중원군의 인구는 충주시와 분리된 1년 후인 1957년 12월 현재 113,114명이었으며, 1966년에는 153,487명으로 충청북도 내에서도 으뜸가는 거대한 군이었다. 그러나 1993년 말 현재는 주민등록상 18,951가구에 67,749명(남 34,531, 여 33,218)이었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 현상과 핵가족화로 인하여 가구당 인구도 5.8~6.4명에서 3.6~3.7명으로 줄었다.

1990년대까지 중원군의 주산업은 농업이었다. 남한강 상류 지역은 굴지의 농산물 생산지로 농경 면적은 총 면적의 21%인 약 185㎢이었으며, 이 중 논이 89.91㎢, 밭이 95.07㎢, 임야가 69%였다. 논은 주로 요도천 계곡의 주덕면과 신니면, 달천 유역의 금가면가금면[현 중앙탑면]에 분포해 있었다.

쌀 생산량은 연평균 약 4만 톤이었으며 그밖에 보리·콩·감자·옥수수 등의 식량 작물, 무·배추·오이·고추 등의 채소류가 생산되었다. 주로 달천 유역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사과·복숭아도 많이 생산되었는데 사과는 충주와 중원군 일대에서 연간 8만 3천 톤을 생산하여 전국 2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주덕면·살미면·중앙탑면·동량면의 경사지가 주산지였다. 임산물로는 밤·호두·잣·은행·표고버섯 등을 생산·재배하였다. 특수 작물인 황색엽연초(황색종 잎담배)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중원의 담배는 재배 면적이 6만 4000㏊로 전국 생산량의 약 25%를 차지하였으며, 경상북도와 수위를 다투는 등 전국적인 핵심 산지였다.

그러나 산업화·도시화에 따라 공장이나 택지, 도로, 공공 시설을 위한 농지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1990년에 179.795㎡에 불과했던 농지 전용이 1993년에는 621.728㎡로 3.5배가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농지 전용이 늘어나게 되어 생산 면적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자, 1993년에 우량 농지를 진흥 지역과 농업 보호 지역으로 지정·고시하여 효율적으로 이용·보전하고 여기에 농업 생산 기반 투자를 집중시켜 농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농업의 대외 경쟁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예로부터 중원군은 우리나라 지하 자원의 보고로 철과 활석은 지방 특산물이었으며, 금·석회석·규석·석탄 등도 채굴되었다. 충주의 철은 역사 기록에도 나올 정도로 알려졌으며, 매장량은 많지 않았으나 고품질이었다. 이류면[현 대소원면]·중앙탑면 등지에서 생산되었다. 활석은 살미면에서 채굴되었으며, 전국 생산량의 80%에 이르고 있었다.

남한강의 수운이 활발하였던 시기의 중원군 지역은 한때 중부 내륙의 교역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가흥에는 세미의 집산지였던 가흥창이 있었으며, 목계는 우리나라 5대 하항의 하나였으며 내륙 지방 제일의 소금 및 염장 어류 시장이었으나 육상·교통 수단의 발달로 인하여 남한강의 수운이 쇠퇴함에 따라 자연 소멸되었다.

[명칭유래]

중원(中原)의 명칭은 중국 대륙의 중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겠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가 지방 제도를 완비한 757년(경덕왕 16)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중원(中原)소경으로 개칭하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940년(태조 23)에 중원을 충주(忠州)로 개칭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995년(성종 14)에는 중원도(中原道)라 하였으며, 이후 조선시대에도 충주를 간간이 중원이라 호칭한 예를 기록에서 볼 수 있으니, 이는 나라의 중심이라는 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형성 및 변천]

중원군은 1956년 7월 8일 충주군 충주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읍의 외곽 지역인 살미면·대소원면·주덕면·신니면·노은면·앙성면·중앙탑면·금가면·동량면·산척면·엄정면·소태면 등 12개 면이 법률 제389호(1956. 7. 8)에 의해 중원군(中原郡)으로 개칭됨에 따라 독립된 군 행정 체계가 마련되어 새롭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후 다음과 같은 일부 행정구역의 변화가 있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5호(1962. 11. 21)에 의해 괴산군 상모면이 중원군으로 편입되어 13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소원면 하문리(河文里)를 괴산군 불정면으로, 신니면 광월리(廣越里) 일부(무수막)를 음성군 음성읍에 각각 편입시켰다(대통령령 제6542호, 1973. 3. 12). 1987년 1월 1일 살미면 목벌리(木伐里)를 충주시로, 제원군 한수면 사기리·명오리·서운리·포탄리·함암리·호운리 등 6개 리가 동량면에 편입되었다(대통령령 제12007호, 1986. 12. 23)

1989년 1월 1일 대소원면 만정리 일부를 충주시 용두동에, 산척면 원월리를 제원군 백운면에 각각 편입시켰으며(대통령령 제12557호, 1988. 12.30), 상모면 문강리·토계리살미면에 편입시켰다(중원군 조례 제1114호, 1988. 12. 30). 이와 같은 변화를 가져오면서 1995년 충주시와 통합되기 직전의 중원군의 면적은 886.2㎢이었으며, 행정구역은 13개 면, 136리, 328개 행정리/동, 908반이다.

[위치비정/행정구역상의 구분]

충청북도의 북부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충주시의 도심권을 둘러싼 외곽의 면(面)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강원도 원주시, 서쪽으로는 음성군, 동쪽은 제천시, 남쪽은 괴산군과 각각 접하고 있었다.

[관련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 2에 “중원경본고구려국원성본고구려국원성신라평지진흥왕치소경문무왕시축성주이천오백구십이보경덕왕개위중원경금충주(中原京本高句麗國原城新羅平之眞興王置小京文武王時築城周二千五百九十二步景德王改爲中原京今忠州)”라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 1에는 “충주목본고구려국원성신라취지진흥왕개위중원경 태조이십삼년우개위충주 …… 성종십사년 …… 칭중원도(忠州牧本高句麗國原城新羅取之眞興王改爲中原京太祖二十三年又改爲忠州 …… 成宗十四年 …… 稱中原道)”라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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