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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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郭氏 |
영어음역 | Cheongju Gwakssi |
영어의미역 | Cheongju Gwak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오갑균 |
[정의]
충청북도 청주에 본관을 둔 성씨.
[연원]
시조는 신라 헌강왕 때에 시중을 지낸 곽상이다. 4세(世) 곽원(郭元)[?~1029]은 고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형부상서를 거쳐 참지정사를 지냈으며, 6세 곽상(郭尙)은 추밀원 좌승선을 거쳐 호부상서·참지정사에 오르고 두 아들로 문충공 탄(坦)과 진정공 여(輿)를 두었다.
누전하여 11세인 곽예(郭預)[1232~1286]는 문한학사와 지밀직사사를 지내고, 두 아들로 운용(雲龍)과 운진(雲鎭)을 두었다. 13세인 곽연준(郭延俊)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개성부사·전법판사에 이르고 충정왕 2년(1350)에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으며 만년에 청주로 낙향하여 세거하면서 본관을 청주로 삼았다.
[세거지]
분파는 18세(世) 이후 지파별로 세거지를 형성하였으며 청주 근교의 세거지는 다음과 같다.
지사공파(進士公派)는 청주, 백동파(栢洞派)는 청원군 강외면, 회암파(回岩派)는 청원군 옥산면 회암리, 성촌파(城村派)는 청원군 옥산면 금계리, 행당공파(杏塘公派)는 청원군 옥산면, 보은파(報恩派)는 보은군, 부강파(芙江派)는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청주파(淸州派)는 청주시 흥덕구 휴암동 등이다.
청주곽씨(淸州郭氏)는 2000년 인구조사표에 의하면 전국에 5,601가구에 18,218명이다
[인물]
청주곽씨는 고려초부터 곽원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시대에서도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곽예는 1255년(고종 42) 문과에 급제, 원종 4년 첨사부록사로서 일본에 가서 왜구(倭寇)의 중지와 고려인 송환을 요청하였고, 충렬왕 때 좌부승지, 국자감대사성을 역임하고 1286년에 지밀직사사로서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오던 길에 병사했다.
곽충보(郭忠輔)[?~1403]는 1383년(우왕 9)에 병마사로 왜구를 격퇴하고 이듬해 예의판서가되었다. 1388년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공을 세웠다. 1390년 왜구를 안성, 죽산, 괴주에서 격파하고, 1392년에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곽재기(郭在驥)[1889~1953]는 3·1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김원봉(金元鳳)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였다. 1920년에 국내에 들어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건으로 6년간 복역했다. 1963년에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묘역]
청원사(淸原祠)는 청주곽씨의 시조 곽원·곽여(郭輿)[1058~1130]·곽예 3위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상당구 명암동 산 3-1번지에 1974년에 청원사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가 1996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곽예의 묘소는 상당구 명암동 산 20-1번지에 있다. 1974년 북이면 대율리 추동에서 이장하였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