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300 |
---|---|
한자 | 郭預 |
영어음역 | Gwak Y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병희 |
성별 | 남 |
---|---|
생년 | 1232년 |
몰년 | 1286년 |
본관 | 청주(淸州) |
초명 | 왕부(王府) |
자 | 선갑(先甲) |
호 | 연담(蓮潭) |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선갑(先甲)이며, 호는 연담(蓮潭)이다. 초명은 왕부(王府)이다. 그의 아들에 곽운룡(郭雲龍)과 곽진(郭鎭)이 있는데, 곽운룡은 벼슬이 도진장(都津長)에 이르렀고, 곽진은 등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었다가 뒤에 관직을 버리고 승려가 되었다.
[활동사항]
1255년(고종 4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었다. 1263년(원종 4) 웅신현(熊神縣)[지금의 경상남도 창원] 물도(勿島)에 왜구가 침입해 공선(貢船)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가자, 첨사부(詹事府) 녹사(錄事)로서 대관서승(大官署丞) 홍저(洪泞)와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화친첩(和親牒)을 가지고 왜구 침범의 중지와 잡혀간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1270년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임유무(林惟茂)가 제거되자 왕이 기뻐하였는데, 곽예(郭預)[1232~1286]는 내원령(內園令)으로서 왕에게 하례하였다. 재능과 덕행이 있었으나 이끌어 주는 자가 없어 관직의 승진이 더디었다. 사관(史官)의 추천으로 예빈주부(禮賓注簿)로서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겸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함에 크게 탁용(擢用)되어 판도정랑(版圖正郞) 보문서대제(寶文署待制) 지제고(知制誥)로 승진하였으며, 필도적(必闍赤)이 되어 기무(機務)에 참여하게 되니 선비들이 사람을 얻었다고 칭하였다. 이어 국자사업(國子司業) 전법총랑(典法摠郞) 위위윤(尉衛尹) 춘궁시강학사(春宮侍講學士)를 역임하였다.
1276년 육운시(六韻詩)로 세자부(世子府) 시학공자(侍學公子) 자격시험을 시행하여 이익방(李益邦) 등을 뽑았다. 1280년 3월에는 왕이 궁전 뒤에 진달래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사운시(四韻詩) 1편을 짓고, 곽예 등 18명에게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한 일이 있다.
1282년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어 우마(牛馬)를 도살함을 금할 것을 건의하였다. 곽예가 과거시험를 맡아 이때 최백륜(崔伯倫) 등 32인을 뽑았다. 좌승지(左承旨)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문한학사(文翰學士)로 승진하였다. 1286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감찰대부(監察大夫)를 더하였다.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갔다 오던 길에 병사(病死)하였는데 나이 55세였다.
[의의와 평가]
사람됨이 평범하고 소담하며 굳세고 곧았으며 겸손하였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평민시절과 같았다. 글을 잘 지었으며 글씨체가 가냘프면서도 굳세어 일가를 이루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 서법을 본받았다.
그가 한림원에 있을 때에 비오는 날이면 맨발에 우산을 들고 혼자서 용화지(龍化池)에 발을 담그고 연꽃을 감상하였다. 훗날 사람들이 그 풍치(風致)를 높이 여겨 그 일을 가지고 시를 짓는 이가 많았다 한다.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었는데 상당구 명암동으로 이장하였다.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이 찬한 신도비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찬한 묘표(墓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