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301 |
---|---|
한자 | 郭元 |
영어음역 | Gwak 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이병희 |
[정의]
고려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활동사항]
996년(성종 15)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여러 번 승진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1011년(현종 2)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를 역임하였고, 1015년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토산물을 바치고, 겸하여 거란이 해마다 내침함을 고하고 위태할 때 구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1016년 형부시랑(刑部侍郞)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승진하였고, 1017년 예부시랑(禮部侍郞)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이 해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정배걸(鄭倍傑) 등 진사 11인을 뽑았다. 1019년 왕에게 아뢰어 과거에서 대책(對策)을 제외하고 논(論)으로써 시험하되, 반드시 『예기(禮記)』 중의 뜻을 제목으로 삼게 하였다.
1022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 왕서와 함께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023년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고, 1024년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으며, 이 해에 서북면 행영부도통(行營副都統)이 되었는데, 이때 도통사(都統使)는 서눌(徐訥)이었다. 1025년 국경에서의 공로로 추성문리공신호(推誠文理功臣號)를 받았으며, 1027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1029년 거란의 동경장군(東京將軍) 대연림(大延琳)이 자기 조정을 배반하고 흥요국(興遼國)을 만들었을 때 곽원이 이 기회를 타서 압록강(鴨綠江) 동쪽을 차지하자고 주장하였다. 최사위와 서눌은 이에 반대하였다. 곽원이 적극 주장하여 출정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는데, 곽원이 부끄러움과 분노가 쌓여 동창이 나서 죽었다.
덕종이 즉위하자 곽원이 훈로(勳勞)가 있었으므로 그 아들 곽증(郭拯)을 등용하였다.
[의의와 평가]
성품이 청렴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재상을 지냈으며 유능한 관리라고 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