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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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 |
영어음역 | Dongnip Undong |
영어의미역 | Independenc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걸순 |
[정의]
일제침략기 애국지사들의 항일 독립투쟁 운동.
[개설]
투쟁과 활동의 유형에 따라 의사, 열사 등으로도 불린다. 의사는 성패에 관련 없이 일제의 침략에 맞서 무기를 들고 친일파나 일본인 고관을 처단 응징하거나 조선총독부 등 침략 기구를 폭파 파괴하는 행동을 결행한 분을 지칭하며, 열사는 일제의 침략에 분개하여 자결하거나 또는 그에 준하는 투쟁을 한 사람을 지칭한다.
[연원]
독립운동사는 1894년 일제의 경북궁 침범사건(갑오왜란)에 분개하여 시작된 의병항쟁(갑오농민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 구한말 청주에서도 국권회복운동의 양대 방법론이었던 의병항쟁과 구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이 있었고, 청주 출신으로 국내외 각지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사도 적지 않다.
[변천]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며 청주지방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이 계속되었다. 그 첫 번째로 구한말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항쟁이 있었다. 전기의병 때는 그 중심지가 충주부(제천)와 홍주부(홍성)였는데, 청주에서도 의병항쟁이 있었다. 중기의병이 봉기한 1905년 을사늑약 후 청주에서 수 백여 명의 의병들이 일본군과 접전을 벌인 기록이 확인된다.
특히 1907년 일제에 의한 한국군 강제해산은 후기의병을 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청주에는 지방 8개 대대 중의 하나로서 공주분견대와 홍주분견대를 예하에 둔 청주진위대가 있었는데, 병력은 장교 7명과 하사 및 병졸 153명 등 160여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진위대원들 중 상당수는 강제 해산 이후 의병으로 참전하여 청주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19년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떨치고 거족적인 3·1운동이 발발하였다. 3·1운동 당시 청주군 출신의 손병희(孫秉熙)[1861~1922], 권병덕(權秉悳)[1867~1944], 신석구, 신홍식(申洪植)[1872~1937] 및 정춘수(鄭春洙) 등이 민족대표로서 참여하였다. 청주의 3·1운동은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으나,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의 항쟁 계획으로부터 비롯되어 군내 각지에서 4월까지 지속되었다.
강내에서 시작된 횃불시위라는 독특한 형태의 운동 방법은 군내 각지로 파급되었다. 일제는 3·1운동을 야만적으로 탄압하여 미원장터 시위 등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4월 중순경에는 일본인 거류민과 친일 부호가 청주자제회(淸州自制會)라는 어용조직을 만들어 만세운동을 금압하려고 시도하였다.
한편 1923년 일제의 식민지 우민화 교육정책에 반발하여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에 호응하여 청주에도 지방부가 조직된 바 있다. 또한 1927년 좌우합작운동으로 신간회가 조직되자, 이해 말 청주에서 신간회 청주지부가 결성되어 이에 호응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청주에서는 1930년 1월 21일 청주농업학교·청주고등보통학교·청주고등여학교 등 3개 학교 학생들이 연합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는 3·1운동 때 사회계층으로 성장한 학생층이 독립운동의 전위부대로 부상하였음을 의미한다.
이후 청주에서의 학생운동은 그리 활발하지는 않았으나,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항거하여 동맹휴학을 벌이는 등 1940년대 전반까지 계속되었다.
3·1운동 이후 각성한 청년들에 의해 청년단체도 조직되었다. 청주청년회는 1920년 6월에 조직되었는데, ‘청주청년회취지서’에 의하면 청년의 품성향상, 지식계발, 체육장려, 풍속개량 등 4대 강령을 제시하고 있으나, 비밀리에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의 성격을 지닌 활동도 하였다.
[활동사항]
청주 출신 독립운동가의 활동 거점은 국내외를 망라하고 있고, 투쟁양상은 독립운동의 전 계열에 걸쳐 있다.
정부는 독립운동가의 계열을 의병, 3·1운동, 문화운동, 국내항일, 의열투쟁, 학생운동, 만주와 노령 방면, 임시정부와 중국 방면, 광복군, 애국계몽운동, 미주방면, 일본 방면 등으로 구분하여 포상을 시행하고 있다. 이는 독립운동가의 활동지역과 활동내용을 종합한 구분이다.
이 구분에 따라 청주 출신 독립운동가의 활동지역과 활동내용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먼저 구한말 국권회복운동인 의병에 참가한 독립운동가로는 한봉수(韓鳳洙)[1883~1972], 정춘서, 조용근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 때에는 손병희, 권병덕, 신석구(申錫九)[1875~1950], 신홍식이 민족대표로서 초기단계를 주도하였고, 김재갑, 김재형(金在衡), 김호상, 박준규, 배민수, 신경구(申敬求), 신영호(申榮浩), 신학구(申學求), 오교선, 윤인보, 이병선, 이용실, 장일환(張一煥), 정무섭, 조동식(趙東植) 등이 각각 고향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김제환(金濟煥)과 조장하 열사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 스스로 자결 순국의 길을 선택하였다. 남상렬, 최명수, 황영래는 독립군으로서, 윤태훈과 신인식은 한국광복군에 배속되어 무장투쟁을 펼쳤다.
신규식(申圭植)[1879~1922], 신건식(申健植)[1885~1963], 이광[1949년 1월~1951년 7월], 정환범 등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으며, 김수사는 중국 방면에서 항쟁하였고, 민강은 비밀결사 대동단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곽재기(郭在驥)[1889~1953] 의사는 의열단 단원으로서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를 준비하는 등 의열투쟁을 펼친 대표적 인물이었고, 신형식(申亨植)과 신흥구(申興求)는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한편 김태희와 신백우(申伯雨)[1886~1959]는 계몽운동을 주도하였고, 박선영, 이상운, 최영백 등은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박무병, 이종만, 이중각, 홍일창 등은 국내에서 다양한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훈, 포장을 수여한 독립운동가를 중심으로 한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내내 한민족이 혼연일체가 되어 독립 쟁취를 위해 항쟁한 장엄한 역사를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현황]
독립운동가에 대한 상훈법은 1949년 4월 대통령령으로 제정되었다. 이후 상훈법은 몇 차례 개정되었으며, 1990년 1월 법률 제4222호로 개정된 상훈법에 의해 건국훈장은 5등급(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변경되었고, 건국포장과 대통령표창을 포함하여 7등급의 포상체계로 운영되고 있다.
당시 청주군 출신 독립운동가 47명의 훈격을 보면 가장 등급이 높은 대한민국장은 민족대표 33인의 수장으로서 3·1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손병희가 유일하다. 대통령장은 상해에 독립운동 기반을 닦고 초기 임시정부를 주도한 신규식과,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참여한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 등 4인이 수여받았다.
독립장은 의병항쟁을 주도한 한봉수와 정춘서, 대동단에 참여한 이광, 의열투쟁을 벌인 곽재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신건식과 이광이 수여받았다. 애국장은 김제환, 박준규, 배민수, 신형식, 이병선, 이상운, 장일환, 정환범, 조용근, 조장하, 최명수, 황영래가 수여받았고, 애족장은 김수사, 김재갑, 김재형, 김태희, 남상렬, 박무병, 박선영, 신경구, 신백우, 신영호, 신인식, 신학구, 신흥구, 오교선, 윤인보, 윤태훈, 이용실, 이종만, 이중각, 정무섭, 조동식, 최영백, 홍일창 등이 수여받았다.
그런데 이같은 훈격은 독립운동가의 기여도나 희생도를 기준으로 한 구분임에 유념하여야 한다. 독립운동의 가치는 경중의 등급을 내길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의의와 평가]
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사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며, 자유와 정의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것이다. 따라서 독립운동은 한국근대사에서 가장 상위 개념이자 주류를 이루는 행동규범으로, 오늘의 시대정신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할 민족의 자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