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001
한자 三-一運動
영어음역 Samil Undong
영어의미역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걸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충청북도 청주군 일원[당시]
관련인물 인종익|신영호(申榮浩)|오석영|조동식(趙東植)|손병희(孫秉熙)[1861~1922]|권병덕(權秉悳)[1867~1944]|신석구(申錫九)[1875~1950]|신홍식(申洪植)[1872~1937]|정춘수(鄭春洙)|한봉수(韓鳳洙)[1883~1972]

[정의]

1919년 3·1운동 당시 청주 일원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 비롯된 만세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3·1운동의 전국 확산은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데, 충청도지방 「독립선언서」의 배포 책임자는 천도교 측의 인종익(印鍾益)이었다.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청주에서는 3월 2일 「독립선언서」 268매가 발견되어 관련자가 일제에 검거되어 취조를 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월 10일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의 시위 계획을 시발로 시작된 청주의 3.1운동은 4월까지 계속되었다.

[발단]

청주 일원에서는 3월 2일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에 의해 최초의 시위 계획이 있었다. 이날 밤, 청주농업학교 2학년생 31명은 시험 연기원을 교장에게 제출하였고, 1학년생 15명은 이날 밤 비밀리에 기숙사를 탈출하였다. 일제는 이 같은 학생들의 행동이 경성으로부터 선동자가 청주로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경계를 삼엄히 하였다.

실제로 전 중앙학교(中央學校) 학생인 신영호(申榮浩)는 귀향하는 길에 수원에서 「우리 2천만 동포에게 경고함」이라는 문서를 입수하여 3월 9일 청주농업학교 기숙사에 들러 학생 오석영(吳錫永) 등에게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는 만세운동에 대하여 설명한 뒤 청주의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나설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오석영 등은 대중에게 배포하기 위해 3백여 매의 경고문을 인쇄하였으나, 일제에 발각되어 처벌당하였다.

[경과]

청주군에서 본격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된 것은 3월 중순으로, 이후 4월 6일경까지 청주, 강내, 미원, 부용, 북일, 북이, 문의 등 거의 군내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청주시에서는 3월 22일의 장날을 이용하여 석교동시장에서 수백 명의 천도교도들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4월 2일의 장날에도 또 다시 만세시위가 있었다.

강내면에서는 3월 23일 밤, 태성리의 산마루에서 봉화시위가 있었다. 이 때 인근의 18개 마을과 옥산, 남이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수십 개소의 산마루에서 봉화가 피어오르고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청주와 조치원에 주둔하던 군대를 출동시켜 수많은 주도자를 체포하였으나, 만세시위는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이 같은 봉화만세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4월 1일에는 청주면, 오창면, 강외면, 부용면, 북일면, 북이면, 강내면, 옥산면 등 8개 면의 산위에서 동시에 봉화가 오르기도 하였다. 봉화 만세시위의 창안자는 조동식(趙東植)이었다. 그는 예로부터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 봉화를 올려 이를 주변에 알리고 경계한다는 예에 따라 이 같은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미원면에서는 3월 30일 오후 1시경 미원장터에서 최대 규모인 1천여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군중은 일본 헌병에 연행당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는데, 일제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부용면에서는 3월 30일 산위에서 봉화가 오른데 이어, 31일 부강역 앞에서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낭성면에서는 3월 31일 주민들이 낭성면사무소를 습격하였으며, 북일면에서는 3월 21일 천도교도들이 내수장터에서 시위를 벌였고, 4월 1일과 2일에는 의병장 출신 한봉수(韓鳳洙)[1883~1972]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북이면에서는 4월 1일 밤 신기리 주민들이 만세를 외쳤고, 4월 6일 밤에는 문의면 인근의 산 위에서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횃불시위를 벌이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강제 해산 당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청주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일제에 피체되어 재판에 회부된 42명을 분석해 보면 농민 28명(66.7%), 학생 9명(21.4%), 면서기 및 고용원 5명(11.9%) 순임을 알 수 있다. 곧 주로 농민층에 의해 만세운동이 주도되었던 것이다.

청주 만세운동의 방법 중 봉화시위는 특징적 양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3·1운동의 초기 단계를 주도한 이른바 민족대표 중 손병희(孫秉熙)[1861~1922]·권병덕(權秉悳)[1867~1944]·신석구(申錫九)[1875~1950]·신홍식(申洪植)[1872~1937] 및 정춘수(鄭春洙)가 이 고장 출신이란 점도 특징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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