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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만 할아버지의 가족과 성장기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3006
한자 -家族-成長期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집필자 김미진

출생과 청년기

고봉만이 집 위치를 설명할 때 건입동 어린이집 옆에 대나무 많은 집이라고 했다. 동초등학교 후문에서 조금 올라온 푸르넷 공부방 앞에 차를 세우고 인성 이용원 앞으로 난 길을 따라 건입동 어린이 집을 찾아 들어갔다. 처음에는 어린이집 정문 앞에서 이집 저집 기웃 거렸지만 금새 눈에 들어오는 집이 있었다. 어린이집을 등지고 남쪽으로 흔들리는 대나무 잎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을 조금 지난 모퉁이에는 팽나무 두 그루가 정자를 이루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가 직접 심었다고 했다. 그리고 앞쪽 나무 밑에는 방화수 탱크가 묻혀있다고 했다. 마당을 들어서자 지난 9월에 개(이름: 진도)가 새끼를 6마리나 낳아서 쪼르르 달려오곤 했다.

고봉만의 집 마당에는 숨겨진 연못이 있고 잔디밭이 있고, 대나무 숲이 있고 바위가 있고, 상추밭이 있고 잡초에 호박넝쿨에 그야말로 작은 자연이다. 잡초도 안 뽑는다고 썩어서 거름이 되는 거라고 했다. 우물자리라며 나뭇가지를 걷어 올리자 웅덩이도 하나 보였다. 현관 옆에는 방울토마토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뒷마당에는 장독대가 그리 정갈하지 않지만 정감 있게 놓여있고, 오른편으로 옛날 밖거리처럼 방하나 부엌하나쯤 딸렸을 법한 지금은 창고가 된 허름한 건물이 있다. 집안으로 난 계단도 있지만 허름한 창고 건물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아들이 사는 2층이다. 이층 앞 베란다에서는 제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고봉만은 2002년도 제주도 방언 구사 기능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래서 건입동 조사 대상자로 선정하게 되었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무식해서 선정되었다한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학’이어야 한다는 선정 조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투에서는 그리 많은 방언이 사용되지 않는다. 아마 공적인 자리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표준어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는 듯하다.

출생과 개명

고봉만 1931년 6월 20일 제주시 영평 하동에서 위로 형 둘, 누나 둘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1931년생인데 호적에는 1935년생으로 올라 있다고 한다. 예전에 아이들이 태어났다가 죽는 일이 허다하여 몇 년 늦게 호적에 올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의 가족의 경우는 형들은 조금 빨리 그는 조금 늦게 올렸다고 한다. 그 덕에 일제시대 때나 4·3사건 때 모든 형제들이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고 아버지의 선견지명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어머니는 마당에서 곡식을 손질하다가 진통이 시작되어 방으로 들어가서 그를 낳았다고 한다. 애기를 낳고 나서 다시 마당으로 나가 곡식 정리를 다했다고 한다. 제주의 여성들은 밭에서 일을 하다가 애기를 밭에서 낳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아기 낳기는 큰 일로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4·3사건 때 중산간 마을 토벌을 피해 해안가 마을인 건입동에 정착, 군생활을 제외하고는 이제까지 건입동에서 살았다.

고봉만의 이름은 처음에 ‘琫生’이었는데 군에 갔다 온 후 할아버지 묘소에 비석을 세우려는데 할아버지 꿈에 3번이나 나타나 날 생자를 쓰지 말고 일만 만자를 쓰라고 해서 개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生의 의미가 좁은 범위이고 개인적인 의미라면 좀 더 큰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萬자로 쓰라고 한 것 같다고 그 나름대로 해석한다.

정직한 아버지

고봉만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많이 배우지는 않았지만 앞을 내다볼 줄 아는 현명함과 그만의 철학을 가진 분이었다고 회상한다. 그의 아버지는 아침 일찍 식사 전에 동네를 돌아보고 오는데 다른 사람의 밭담이 허물어졌으면 잘 정리해주곤 했다. 말이나 소가 밭담이 허물어지면 남의 밭곡식을 먹게 되는데 말을 모르는 짐승이니 때릴 수도 없고 집안 살림이 넉넉지 않아 배상해주지도 못하니 미리 막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집말이나 소가 남의 밭곡식을 먹지 못하게 그의 아버지는 남의 밭에 담을 잘 정리해주러 다녔다고 한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땅에 떨어진 남의 보리 이삭이나 조 이삭 하나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 밭에서 조나 보리를 수확하여 집에 싣고 오는데 길이 좁아서 옆에 담이나 나무에 걸려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면 그의 아버지는 뒤 따라 오다가 앞에 가던 구르마(마차)에서 떨어진 곡식 이삭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마차 주인 집 마당에 가서 주머니에 넣었던 곡식 이삭을 던져두고 집에 왔었다고 한다. 그만큼 정직한 분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고태평은 87세(1967년)에 세상을 뜨셨고, 어머니 윤태수는 114살(1992년)에 돌아가셨는데 작년에 확인한 바로는 우리나라에 아직 어머니 이상 장수한 분이 없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큰 아버지

할아버지는 우마장사를 했었다고 한다. 제주에서 목포쪽으로 말을 배에 싣고 가서 팔아가지고 올 때는 무명을 사다가 제주에 와서 팔기도 했다. 그러다가 배를 타고 목포를 가신 할아버지가 소식이 없었다. 할아버지네 집에서 키우는 개가 북쪽을 보고 매일 울고 밥을 안 먹어서 혹시 할아버지께 무슨 일이 있나 모두들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배가 난파되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두꺼운 널빤지에 몸을 밧줄로 잔뜩 동여매어 제주에서 시신이 제일 많이 떠내려 오는 곳인 별도봉 밑에 떠내려 왔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신이나마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같은 배에 탄 다른 사람은 시신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큰아버지가 증산도 계통의 ‘보천교’라는 종교를 믿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아 놓은 재산을 보천교에 바치고, 팔아서 써버렸다고 한다. 보천교는 1911년 차경석이 증산도와 동학의 교리를 중심으로 인의(仁義)의 실천을 기본 교리로 창설한 민족종교로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십일전 경복궁 근정전보다 두 배나 크고 웅대하여 당시의 보천교 교세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일부에서는 일제시대 물산장려운동의 주체가 보천교이며 항일운동의 자금원이었다고도 한다. 21살 차이나는 막내인 그의 아버지에게는 손톱만한 재산도 남겨주지 않아 아버지는 남의 밭을 경작하는 일을 하는 등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추억들

어렸을 때의 추억은 소 먹이러 다녔던 것과 짚신 삼아서 신었던 것 등을 이야기 했다. 4살 때부터 소 먹이러 다녔는데 당시 집에 있던 소 4마리를 몰아서 집에서 동네 산까지 소에게 풀을 먹이러 다녔다고 한다. 너무 어린 나이라서 동네 어른들이 가마귀에게 물려갈 것 같다고 걱정을 하면 막대기를 공중에 휘두르며 자신 있게 가마귀를 이길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6살부터 짚신을 삼기 시작했는데 아버지께 짚신 삼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남이 만든 것을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비 오는 날 뒷집아저씨가 짚신 만드는 것을 보고 배워서 그 후로 소 먹이러 가서 매일 짚신을 삼았다. 처음에는 만드는 방법을 잘 몰라서 대충 만들고 신으면 곧 헤어지곤 하였다. 6살짜리가 만든 것이니 제대로 된 것일 리 없다. 하루에 대여섯 켤레의 짚신을 삼고 그것을 들고 다니면서 조금 신다보면 발가락이 하나 나오고 뜯어지거나 하면 던져버리고 다른 것을 신곤 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한 설움

고봉만이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은 영평초등학교와 4미터 거리밖에 안되었는데 그의 부모들은 돈이 없어서 그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였다. 형과 누나는 영평초등학교를 조금 다녔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그는 아예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학교 다니는 친구나 형들에게 샘도 나고 해서 자기 집 앞으로 다니지 못하게 엄포를 놓기도 했었다. 그는 소를 먹이러 다니는데 또래 친구들은 학교 다닌다고 해서 자신의 집 앞으로 다니지 말라고 어린 마음에 집 앞에 지켜 서서 자신의 집 올래(앞 길)이라고 못 지나가게 했었다. 그러면 3~4살 위의 형들도 ‘저기 고봉생이 샀저(서있다)’면서 다른 길로 돌아 다녔었다. 키는 지금도 작지만 그때도 작은 편이었는데 힘도 세었고, 배짱도 두둑했었던 듯하다. 그는 어렸을 때 특별한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억울한 누명

소와 말을 먹이러 다닐 때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소 먹이러 왔다가 주위의 나무를 주워 다가 불도 쬐고 콩 밭에서 콩을 따서 구워 먹는 일이 있었다. 멀리서 다니다가 어두워 갈 때 사람들이 모두 가버리자 콩 구워 먹던 곳에 가서 구워진 콩을 주워 먹었었다. 하루는 콩밭 주인 할아버지가 콩을 주워 먹는 고봉만을 발견하고 자신의 밭에 있는 콩을 다 따서 먹어버렸다면서 콩밭 망쳐 버렸다고 혼을 내면서 대나무 막대기를 가져다가 때린 적이 있었다. 어른 들이 먹다 남은 콩 주워 먹은 것도 죄냐고 항변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집에 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혼도 났다. 너무 화가 나고 분하여 다음 날은 그 할아버지 콩밭을 일부러 망쳐 버렸다. 죄가 없는데 때리고 혼을 내었다고 복수를 한 것이다. 그 할아버지가 미안하다고 콩밭을 망치지 말아달라고 사과를 받은 후에야 콩밭 망치는 것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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