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445 |
---|---|
한자 | 金熙胄 |
영어음역 | Kim Huiju |
이칭/별칭 | 장녀(長汝),남파(南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나영 |
성격 | 관리|제주군수|정의군수 |
---|---|
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
성별 | 남 |
생년 | 1854년![]() |
몰년 | 1937년![]() |
본관 | 김해 |
대표경력 | 사헌부감찰|제주군수|정의군수|평창군수 |
조선 말기 제주군수와 정의군수를 역임한 관인.
본관은 김해. 자는 장녀(長汝), 호는 남파(南坡). 아버지는 만호 김계병(金啓柄)이다.
1879년 무과에 급제하여 1888년(고종 25)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1890년 강원도 평창군수를 역임하였다. 1897년(광무 1) 12월 29일 유긍환(兪兢煥)의 후임으로 제주군수로 부임했다. 제주군수 재임 중인 1898년 지금의 제주의료원 자리에 찰미헌(察眉軒) 곧 이아동헌(二衙東軒)을 중수하였다.
방성칠의 난이 있었던 1898년(광무 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제주 백성들이 마장세(馬場稅)·화전세(火田稅)·환곡 등이 과다하다 하여 소요를 일으켰을 때 제주군수 김희주가 자리를 비웠으므로 죄를 물어야 하나 사태가 급박하니 우선 용서하고 제주군수 직책을 유지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라는 점이 고려되었던 것이다.
김희주는 1901년(광무 5) 2월에 정의군수로 부임했다가 같은 해 6월 중추원의관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