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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207
한자 抗日運動
영어음역 Jeju Hangil Undong
영어의미역 Anti-Japanese Movements in Jeju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만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 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일제 강점기
종결연도/일시 1945년연표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전까지 제주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의 역사는 타민족의 지배 하에서 더욱 심하게 왜곡되었으며, 이 시기 제주 사회는 한국의 다른 지역 못지않게 심한 식민지적 수탈과 착취, 민족적 차별을 받는 가운데 이전 시기보다 예속 상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일제는 1912년부터 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해안 일주 도로 포장에 나서 1918년에 확장 공사를 끝냈다. 일주 도로는 제주의 각종 산물을 산지·한림·성산포·서귀포 등 항구로 쉽게 수송하여 외부로 반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도민들에게 신작로라 불리던 일주 도로의 완공에 따라 조선 시대 이래 대촌이었던 성읍·홍로·명월·대정과 같은 마을들은 쇠락한 반면, 성산포·서귀포·한림·모슬포와 같은 마을들은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도로 개설을 통한 일본으로부터의 자본 유입은 제주도민들의 생활상을 일부 향상시킨 면도 없지 않으나 제주도의 자생적 발전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다.

1913년부터 시작된 토지 조사 사업은 국유지와 공유지가 많았던 제주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과거 목장토와 역둔토를 경작하던 빈농과 화전민들은 토지 조사 사업과 화전 금지에 따라 경작지를 구하지 못하여 외부에서 생활 기반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민 대부분은 빈궁과 기아 속에서 생활고에 시달리자 이의 탈출을 위하여 일본 등으로 나갔으나 탄광이나 방직 공장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1920년 여름에는 4개월 동안 콜레라가 창궐하여 도민 4,134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23년 제주도와 오사카 사이에 직항로가 개설되면서 제주도민들은 일본으로 대거 도항하기도 하였다.

[변천]

1. 1910년대

일제 강점기 제주인들은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의 전면에 나섰는데, 제주 지역에서의 항일 운동은 조천면의 1919년 제주 3·1 운동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조천리 출신의 휘문 고등 보통학교 학생이었던 김장환은 서울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귀향하여 삼촌 김시범, 김시은 등과 의논하여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김장환, 김시범, 김시은 등은 1919년 3월 21일 조천 미밋 동산에 모여서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에 돌입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 시위는 함덕리, 신촌리 등 조천면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2. 1920년대

1920년대 제주 지역의 청년들은 민중 계몽과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들은 각종 수양회·흥학회·청년회 등의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대중을 계몽하였는데, 제주 지역 청년 운동의 선구자였던 김명식·고순흠·김문준 등 세 사람은 모두 북제주군 조천읍이 배출한 인물들이었다.

3. 1930~1945

1930년대로 접어들자 제주 지역에서의 항일 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이 시기 운동의 특징은 주로 청년·학생층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조직적인 사회 운동과 더불어 해녀 항쟁과 같은 대중 운동도 주도다.

1930년대 최고 절정을 이루었던 항일 운동으로 해녀 항쟁이 있었다. 해녀 항쟁은 1931년부터 1932년 초까지 구좌면·성산면의 6개 마을 해녀들이 관제화된 해녀조합의 횡포에 저항하여 일본인 제주도사를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해녀 항쟁에는 연인원 1만 7000여 명이 참여하였고, 검거된 사람만도 100여 명에 이르는 제주 지역 최대의 항일 운동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여성 운동이며 어민 투쟁이었다.

해녀 항쟁 이후 제주 지역의 항일 운동은 다수의 주도 청년들이 검거됨에 따라 그 맥이 단절되어 버렸으나 지하로 잠적하였던 청년 일부가 흩어져 있던 운동가들을 규합하여 한림과 애월, 조천 지역을 중심으로 혁명적 농민 조합의 건설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농민 조합의 활동 또한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고, 1940년대 전시 체제하에서 도민들은 해방 전까지 징병, 징용, 강제 노역 등으로 참혹한 시기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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