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1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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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遊小白山錄 |
영어공식명칭 | Yusobaeksallok(Literary Writi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미숙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01년 - 이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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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549년 - 「유소백산록」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570년 - 이황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43년 - 「유소백산록」 『퇴계집』권41, 잡저에 수록 |
배경 지역 | 소백산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
성격 | 산문|기행문 |
작가 | 이황 |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의 명산 소백산을 유람하고 퇴계 이황이 남긴 기행문.
[개설]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은 1549년(명종 4) 이황(李滉)[1501~1570]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소백산을 유람한 후 그 풍경을 보고 기록한 글이다. 이황은 자신 이전에 여러 명현이 소백산을 유람하였으나 그것을 전할 만한 문헌이 없기에 이를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등산 경로가 후대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짧게 기록해 놓았다. 「유소백산록」은 이황의 문집인 『퇴계집(退溪集)』에 수록되어 있다.
[구성]
「유소백산록」은 출발한 첫날부터 어떤 경로로 산에 올랐는가에 대해 순한문으로 쓴 산문인데, 4박 5일간 이황의 행적이 시간순으로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기행 순서를 보면 4월 신유일에는 백운동서원[소수서원]에서 유숙하고, 임술일에는 죽계를 경유하여 안간교, 초암, 백운대, 태봉 서쪽, 철암, 명경암을 거쳐 석륜사에서 숙박하였다. 계해일에는 중백운암, 석름봉, 상백운암, 제월대를 거쳐 석륜사에서 숙박을 했다. 갑자일에는 상가타암, 환희봉, 석성 옛터, 중가타암, 죽암폭포, 금당암, 하가타암, 관음굴에서 유숙하였다. 을축일에는 박달재, 상원봉(上元峰)의 낮은 곳, 비로전 옛 터, 비류암, 욱금동을 거쳐 고을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내용]
이황은 등산을 좋아했으나 체력이 부족하고 세상의 일에 매여 쉽게 실행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영주와 풍기 사이를 오가며 40여 년간이나 꿈꾸어오던 소백산을 오르게 된 것이다. 글의 첫머리에 이러한 감회가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젊었을 때 영천(榮川)과 풍기 사이를 왕래하였으니, 소백산은 머리만 들면 바라다보이고 발만 떼면 갈 수 있었는데도 조급하게 허둥대느라 오직 꿈에서 그리운 마음으로만 달려간 것이 이제 40년이 되었다. 지난해 인부(印符)를 차고 풍기에 부임하여 백운동서원의 주인이 되니, 속으로 기쁘고 다행스러워하며 오랜 소원을 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난 겨울과 봄 이래로 일이 있어서 백운동에 갔다가, 그때마다 산문을 엿보지도 못하고 돌아온 것이 세 차례나 되었다. 4월 신유일에 며칠째 내리던 비가 막 개니 산 빛이 목욕이라도 한 것 같았다. 이에 백운동서원에 가서 유생들을 만나보고 그대로 머물러 잤다. 다음날 드디어 산에 들어갔는데, 상사(上舍) 민서경(閔筮卿)과 그 아들 민응기(閔應祺)가 따라나섰다.”라고 하였다.
한편, 이황은 “산을 유람하는 사람은 참으로 기록이 없을 수 없고, 기록이 있는 것은 산을 유람하는 데 참으로 도움이 된다.”라고 하면서, 많은 이들이 소백산을 유람했을 것인데 그것을 전할 만한 문헌이 없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퇴계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산록을 남기는 이유를 “공문서 속에서 몸을 빼어 임시로 산어귀를 거니는 우리 같은 무리야 어찌 이 산에 가치를 실어주겠는가? 우선 본 것을 차례로 펴서 지은 것을 기록하니, 뒤에 보는 자가 이 글에 관한 느낌이 또한 나의 주경유(周景遊)[주세붕(周世鵬)]에 대한 느낌과 같을 것인가. 가정(嘉靖) 기유년[1549년] 5월 어느 날 서간병수(栖澗病叟)[이황]는 기산(基山)의 군재(郡齋)에서 쓰노라.”라고 말하면서 기록의 중요성도 함께 언급해 놓았다.
[특징]
이황은 등산을 독서에 비유하곤 했다. 그는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에서 “사람들이 말하길 독서가 유산하는 것과 유사하다 했는데[讀書人說遊山似] 이제 보니 유산하는 것이 독서와 비슷하네[今見遊山似讀書]”라고 했듯이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체험하게 되는 크고 작은 것들이 독서를 할 때 체험하게 되는 것과 아주 유사하다고 생각하였다. 즉, 「유소백산록」은 단순히 이름난 경치를 보면서 마음에 품고 있는 회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황의 학문관을 보여주는 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유소백산록」은 현재 전하는 소백산 유산록 가운데서는 가장 앞선 것이다. 이황은 산에 오르는 것을 단순한 여가의 하나로 생각하지 않고, 공부와 수행의 과정으로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