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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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季登 |
영어공식명칭 | Kim Gye-deung |
이칭/별칭 | 김익영(金益榮)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07년 - 김계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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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5년 3월 - 김계등 영주공립보통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1월 15일 - 김계등 신간회 영주지회 대표위원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3월 - 김계등 영주농민조합 집행위원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7월 30일 - 김계등 신간회 영주지회 집행위원 겸 대표회원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4월 - 김계등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결성 |
출생지 | 김계등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
학교|수학지 | 영주공립보통학교 - 경상북도 영주시 |
활동지 | 김계등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회원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
[개설]
김계등(金季登)[1907~?]은 1920년대 영주청년동맹·영주농민조합·신간회 영주지회에서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0년대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통해 혁명적 농민조합운동과 반제동맹을 추진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김계등은 1907년 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김익영(金益榮)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활동 사항]
김계등은 1925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농업에 종사하던 중 사회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영주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이에 1927년 11월 25일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7년 12월 17일에는 영주청년동맹 이산지부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에 앞서 1927년 8월 29일 신간회 영주지회가 결성되자, 김계등도 가입하여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1월 15일 신간회 영주지회 정기대회에서 대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7월 30일 신간회 영주지회 임시대회에서는 집행위원 겸 대표회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영주를 비롯한 경북 지역에 한해(旱害)가 발생하자 구제연설회를 개최하였는데, 김계등은 서대(西隊)에 편성되어 풍기와 순흥 일대에서 강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3월 풍기농우동맹이 해산되고 영주농민조합이 결성되었을 때, 김계등은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4월에는 영주농민조합 이산지부 설립대회의 임시집행부 의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개회선언과 축문 낭독을 했다. 1929년 김계등은 영주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일하던 중 순흥청년회를 해체하는 활동을 벌였다. 영주청년동맹 창립 이후 순흥 등 각 면에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해산되어야 할 순흥청년회가 해산하지 않고 영주청년동맹의 활동 방침과 다른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김계등은 1929년 8월 김화진(金華鎭)[1904~1946]과 함께 순흥청년회 총무 차병섭(車秉燮)을 만나 “나는 김익영[김계등]이라 불리는 사람인데, 청년회의 합동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종래의 청년회는 자유로이 설립되었지만 이후 조선청년동맹에서 조직을 변경하고 군부단일동맹체를 채택하기로 하여 영주에도 청년동맹이 설립된 것이었다. 동군 내의 청년운동은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귀하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물으면서, 순흥청년회의 해산을 요구하였다. 만약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청년회관을 영주청년동맹에 대여해 주던가, 영주청년동맹의 간판을 순흥청년회관 사무소에 걸을 것이라고 압박하였다. 하지만 이 문제로 김계등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30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언도받았다. 김계등은 불복하여 상고하였고, 1930년 9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벌금 50원을 언도받았다. 9월 12일 김화진·김태두(金泰斗)·권학석(權鶴石) 등과 함께 영주 지역 동지들의 열혈한 환영 속에 출옥하였다.
1931년 9월 김계등은 김봉호(金鳳鎬)[1884~1950]·김화진·박병성(朴炳星)[1904~?]·정규찬 등과 함께 농민운동과 반제동맹을 전개하기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1932년 4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하였는데, 김계등이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가 조직하려는 혁명적 농민조합의 목적은 노동자·농민에 의해 독재 정부 수립에 있었다. 또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고 동시에 조선혁명의 현 단계인 농업혁명의 실현’이라는 반제동맹의 구호를 내세웠다. 이후 일제의 만주 침략이 시작되자,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는 이것이 일본제국주의 몰락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출병 반대’, ‘제국주의 전쟁 반대’, ‘소비에트 러시아 사수’, ‘중국혁명 지지’ 등을 강조해 나갔다.
1932년 7월경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던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 형사와 영주경찰서 및 봉화경찰서 경찰에 의해 김계등 등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32년 9월 19일 이 중 73명이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어, 김계등 등 12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되고, 34명은 기소유예 처분, 나머지는 기소중지 내지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