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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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鳳鎬 |
영어공식명칭 | Kim Bong-ho |
이칭/별칭 | 김동필(金東弼)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884년 11월 9일 - 김봉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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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2년 2월 - 김봉호 조선노동공제회 영주지회 간사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1월 - 김봉호 풍기소작조합 결성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4월 - 김봉호 조선노동연맹회 중앙닙행위원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2월 - 김봉호 풍기청년회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김봉호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김봉호 풍기농우동맹 의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8월 29일 - 김봉호 신간회 영주지회 조직선전부 상무간사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1월 15일 - 김봉호 신간회 영주지회 부회장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3월 - 김봉호 영주농민조합 집행위원장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7월 30일 - 김봉호 신간회 영주지회 검사위원 겸 대표회원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4월 - 김봉호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조직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3월 28일 - 김봉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 김봉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김봉호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
거주|이주지 | 김봉호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신간회 영주지회 부회장|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조직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봉호(金鳳鎬)[1884~1950]는 1920년대 영주 지역에서 농민운동과 신간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통해 혁명적농민조합과 반제동맹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김봉호는 1884년 11월 9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김동필(金東弼)이다.
[활동 사항]
김봉호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다. 1922년 2월 조선노동공제회 영주지회를 설립하여 간사를 역임하였으며, 1923년 1월에는 풍기소작조합 결성에 참여해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4월 제2차 조선노동연맹회 정기총회에 풍기소작조합 대표로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2월에는 풍기청년회에 참가하였고, 같은 해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5월 풍기소작조합이 지세불납투쟁을 진행하는 가운데 노농교육연구회를 결성하였고, 경북사회운동자동맹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을 맡았다.
1925년 풍기소작조합이 “세계 조류에 합류하기 위한다”라는 명목으로 풍기농우동맹으로 전환하였는데, 이후 김봉호는 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처럼 김봉호는 영주 지역에서 여러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1926년 2월 9일 업무방해 및 소요죄로 징역 10월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출옥 후 김봉호는 신간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8월 29일 영주청년회 대강당에서 신간회 영주지회 설립대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김봉호는 전형위원과 조직선전부 상무간사로 선임되었다. 이어 1929년 1월 15일 개최된 정기대회에서는 신간회 영주지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29년 7월 30일 개최된 신간회 영주지회 임시회에서는 검사위원 겸 대표회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3월 풍기농우동맹이 해체되고 영주농민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때 김봉호는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김봉호는 각 면에 지부를 설치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무렵 김봉호는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과정에서 몇 차례 투옥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김봉호는 경성에서 열린 신간회 대회에 참석해 영주 출신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 박승원(朴勝源)[1913~?]을 만나게 되고, 이후 영주에서 혁명적 대중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31년 9월 영주의 사회운동가와 만난 김봉호는 농민운동과 반제동맹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1932년 4월 준비과정을 거쳐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게 된다. 반제동맹의 목적은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고 동시에 조선혁명의 현 단계인 농업혁명의 실현’에 있었다.
이어 김봉호는 예천무명당 및 봉화적색농민조합과의 연계를 통한 외연 확대를 도모하였다. 그런 가운데 일제가 만주 침략을 단행하자,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는 이를 일본 제국주의 몰락의 시작으로 확신하면서, ‘출병 반대’, ‘제국주의 전쟁 반대’, ‘소비에트 러시아 사수’, ‘중국혁명 지지’ 등을 강조해 나갔다. 1932년 7월경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던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 형사와 영주경찰서 및 봉화경찰서 경찰에 의해 김봉호 등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32년 9월 19일 그중 73명이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어 김봉호 등 12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되고, 34명은 기소유예 처분, 나머지는 기소중지 내지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김봉호는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김봉호는 재판 과정에서 경찰서에서 했던 진술 내용을 전면 부인하고, “우리가 살기 위한 농촌운동이 무엇이 죄가 되느냐?”라며 일제의 탄압에 반발하였다. 1935년 8월 11일 김봉호는 3년의 복역 기간을 마치고 만기 출옥했다. 해방 후 김봉호는 영주군인민위원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초대 인민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봉호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